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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우성 인자

by 최서희

산 너머 두어 마지기 논으로 약을 치러 갈 때면 어김없이 그놈들이 우글거리는 소나무 아래를 지나야 했다. 어찌나 털이 숭글숭글하고 징그러운지, 좁다란 길에 이를 때면 두 눈을 질끈 감고 단숨에 달음박질하곤 했다. 어떤 이들은 등산길에 그 징그러운 놈들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지. 상상만 해도 온몸에 닭살이 돋는다.

그러나 10년이 흐른 뒤 같은 산길을 지나며 나는 애써 그놈들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파란 솔잎을 자랑하는 소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어째서 그놈들은 보이지 않는 걸까. 이제는 눈을 감고 정신없이 뛰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는 생각 대신, 어딘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 징그러운 놈들이 정든 소나무를 떠난 이유는 가까이 있던 갯벌이 간척지로 변하면서 예전 우리 소유였던 두 마지기 논도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불현듯 대학 면접 때 간척지 사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교수님의 질문이 떠올랐다. 순진했던 나는 경제적인 이득보다는 감춰진 자연의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며 자신 있게 반대 의견을 내놓았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6년이 지난 지금, 같은 질문에 나는 과연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징그럽기만 하던 송충이가 그리워지는 이 순간, 가슴과 머리는 분리된 채 갈등하고 있었다.

내 아들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모내기를 해야 하고, 내 딸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못밥을 짓고 어망을 손질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정말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라는 인사를 건네고는, 모내기나 어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은 매연을 뿜어내는 자동차를 타고 휙 떠나가겠지.

나는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서 네모난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흙 묻은 장화보다 세련된 구두를, 거칠고 검은 손보다 매끄럽고 흰 손을 꿈꾼다. 그러나 세련된 구두를 신고 걷는 아스팔트 길은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매끄럽고 흰 손으로 연신 두들기는 딱딱한 키보드는 손의 기능을 점점 퇴화시키고 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래도"라고 말한다.

가끔은 높은 힐로 인해 무릎관절이 아파도, 가끔은 넷째 손가락에 낀 금반지가 수갑처럼 느껴져도 나는 부자 엄마를 꿈꾸며 도시를 고집한다. 갯벌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보다 간척지의 숨이 없는 생산이 더 값어치 있다고 여기는 계산은, 감정을 다스리는 우뇌보다 수리를 담당하는 좌뇌가 우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이쯤 되니 괜히 심술이 난다. 내 어쩔 수 없는 속물근성 때문이요,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못난 욕심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 축복받은 도시인이다. 그리워할, 언제든 찾아가 쉴 수 있는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대학생도, 예비 교사도 아닌 우리 아버지의 셋째 딸, 맹희에 불과하다. 이쁘게 화장하지 않아도 되며, 높은 힐을 신지 않아도 된다. 나는 고마운 부모님의 딸이다.

하지만 내 딸은 어떨까? 그녀가 도시의 인색함에 실망할 때쯤, 나는 그녀의 손에 어떤 기차표를 쥐여주어야 할까? 내 고향? 그래, 내 딸까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손녀에게는 어디를 보여줄 수 있을까? 산과 바다마저 인간의 손으로 다듬고 꾸며진, 만질 수는 없지만 돈을 내면 볼 수 있는 그런 관광지?

이쯤 되니 나는 괜히 우뇌와 좌뇌를 연결해 주는 신경세포에게 화풀이를 한다. 내일은 작동을 멈춰버린 손익계산을 담당하는 뇌의 신경세포를 위해 기름칠이라도 해야 할까. 아직도 정직이 가장 큰 무기인 시골, 고금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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