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지 않는다 해도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기에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제일 뒷전으로 미루어두는 것이 여행이다. 여섯 식구가 먹고살기 빠듯했던 나의 어린 시절에는 여행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여행다운 여행을 다닌 것은 운전하기 시작한 서른두 살 이후인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여행이라고 해봤자 학교에서의 단체 소풍이나 수학여행, 교회에서 가는 수련회, 온 가족이 함께 갔던 롯데월드나 어린이 대공원이나 천안의 외갓집, 진주 사는 고모집 정도가 전부였다. 대학 동기들이 인도니 유럽이니 영국이니 여행이나 어학연수를 떠날 때도 비행기 타고 이국을 가는 일은 그저 내게 꿈같은 일로만 느껴졌다.
나는 37살까지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다. 그때까지 나뿐 아니라 언니와 동생 또한 비행기를 타도 해외를 가본 적이 없었다. 수학여행으로 떠난 제주도를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당시 IMF로 인해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도 가보지 못했었다. 아빠는 '외국인노동자'로 일하느라 해외를 경험했지만, 엄마는 직장에서 보내준 제주도 말고는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 식구들에게 해외여행이란 '큰돈 들어가는 일. 그래서 우리는 하면 안 되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 나중에 돈 많이 모든 다음에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 식구들 중 아무도 여행으로 해외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하고 오랫동안 살아왔다.
나의 첫 해외여행은 37살의 여름에 실현되었다. 방학을 이용하여 약 2주간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다 왔다. 한국인이 많이 가는 여행지는 아닌지라 러시아에 간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러시아에 가는 이유가 뭐냐고 되물었다.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동행한 친구가 선택한 여행지다. 친구는 이십 대때 교사가 되어서 방학마다 해외여행을 다녔으니 유명 여행지는 대부분 가봤고, 친구가 다녀온 국가를 피하다 보니 러시아가 목적지가 된 것이다. 나는 첫 해외여행이었으니 어디든지 상관없을 터였다. 여행을 분비하며 내가 제일 먼저 했던 말은 "너무 비싸다"였다. 생전 처음으로 치러보는 비행기 표값이나 호텔 비용이 내겐 너무도 비싸게 느껴졌다. 또 캐리어도 장만해야 했고 환전도 해야 했으니 모든 게 다 돈이었다. 러시아에서 물 사 마시는 비용, 화장실 이용료 내는 것까지 모든 게 아까웠다. 한국에서는 다 공짜인데 말이다.
첫 해외여행을 경험한 후, 난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큰돈을 이렇게 며칠만에 다 쓰는 게 맞는 건지, 그렇게 돈을 쓰고 얻은 것은 무엇인지, 굳이 비행기를 타고 머나먼 타국까지 가서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다는 것을 알기 위해 비싼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인지, 결국 다시 돌아오기 위해 비싼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이지 생각이 많아서 여행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태국, 베트남, 일본을 더 다녀왔다. 심지어 일본은 나 홀로 떠난 여행이었다.
내가 첫 해외여행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 이유는 '소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여행에서 무엇인가 교훈을 얻고자 잔뜩 힘주고 긴장했기 때문이리라. 한마디로 투자 대비 뽕을 뽑고 싶었던 것이다. 도둑질도 해본 사람이 해본다고 첫 해외여행은 돈을 많이 쓴다는 두려움에 쫄보처럼 벌벌 떨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소비에 대담해진다. 이제 내게 방학은 '당연히 해외여행 가는 시기'이다. 여행을 통해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목표도 잃은 지 오래다. 그저 떠나고 싶을 뿐이다. 이국의 풍경이 보고 싶다. 이국의 사람들을 보고 싶다. 이국의 언어들을 듣고 싶다. 낯선 땅의 이방인이 되어 자유로이 유랑하고 싶다. 그게 여행하는 이유의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