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저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을 미워하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미워하고 있는 줄 조차도 눈치 못 채도록 교묘히 자신을 조롱하고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조울증 약을 복용하고 감정이 안정을 찾아가면서 깨달았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얼마나 숨 막히게 억압하며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는지요.
일단 제 몸이 뚱뚱한 것부터가 싫었습니다. 십 대 이십 대 시절, 제 또래 여자들은 대부분 마른 체형을 가지고 있었어요. 신진대사가 활발하고 활동량이 많은 그 나이에 살이 붙는 게 더 어려운 일이겠지요. 게다가 그녀들은 저처럼 많이 먹지도 않았어요. 저는 종일 먹을 생각만 하고 학교 가는 버스에서도 늘 먹을 것을 가지고 탔어요. 강의실에 일찍 도착하면 매점을 먼저 갔고요. 돈이 없을 때조차 먹을 걸 사는 게 우선이었지요. 배가 고플 때나 안고플 때나 늘 먹을 것을 찾았어요. 이런 제 자신을 얼마나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봤는지요. 살을 빼고 싶어도 번번이 음식에 대한 충동을 이기지 못하니,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말로 그럴듯하게 속내를 포장하고 살았지요. 살을 제일 많이 빼본 게 10kg인데, 그렇게 빼도 6개월 이내에 곧 원상 복귀됐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싫었던 건 임용고시를 붙지 못한 거였어요. 어디 가서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교원자격증을 가지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전부인데 말이죠. 나이는 한 살 한 살 먹어가고 제가 간절히 하고 싶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공부하기 싫다"는 마음 앞에 무너지는 제 자신이 너무나 혐오스러웠습니다. 부모님은 없는 살림에 제가 4년제 대학을 마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주셨지요. 그런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 많이, 아팠습니다. 제가 정규직 교사가 되어서 안정감 있게 그리고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두 분께 보여드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남들 앞에서 '우리 딸 선생한다'라고 자랑이 되어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소개팅을 하더라도 저를 '교사'라고 소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계약직으로 생활하며, 결혼도 하지 못한 저는 부모님의 아픈 손가락입니다.
언젠가 한 번은 제가 임용고시 합격하는 걸 봐야 눈을 편히 감을 수 있겠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공부가 하기 싫어서 공부를못했습니다. 하기 싫어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지만 책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책을 아무리읽으려 해도 머릿속에는 어느새 다른 생각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혐오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재를 즐긴다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임용을 접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해봐도 마음 한편 공허한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ADHD와 조울증 진단을 받고 보니 제가 달리 보였습니다. ADHD와 조울증을 지니고도 이만큼 살아낸 제가 대견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집중이 안되고 실행이 안되는데 그 와중에 어떻게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교원자격증을 땄을까요? 그리고 석사를 두 번이나 할 생각을 하다니, 너무 대단하지 않나요? 그렇게 감정이 요동치는 와중에 큰 실수 없이 직장생활을 십 년 이상 하고 있으니 너무 기특하지 않나요? 깊은 우울과 절망에 빠져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꽤 많았지만, 그 유혹을 저버리고 저는 꿋꿋이 일상생활을영위하고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다는, 놓아버리고 싶다는 그 달콤한 유혹을 무사히 물리치고 지금껏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생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마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굽이마다 제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저를 살게 했습니다. 착실하고 순진하게 자식들을 키워내신 부모님과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저의 형제들, 저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학생들, 청춘을 함께 불태우던 벗들, 읽어왔던 책들과 읽고 싶은 책들, 커피와 차의 향기, 여행지에서의 맥주, 아름다운 바다를 품은 제주, 초록이 무성한 여름..... 결국 사랑과 아름다움이 저를 살게 했습니다. 사랑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순간을 위하여 오늘도 저는 살아갑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지만 저는 제 생각과 달리 결코 부족하거나 모자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도 일상을 지켜낸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늘 완전했고 온전했습니다. 언제나 제가 할 수 있는 한 힘껏 살아왔던 거였습니다. 그게 비록 남들 눈엔 한없이 부족해 보일지라도, 저에게는 언제나 최선이자 최고였음을 이제는 압니다. 43세의 늦가을에 발견한 ADHD와 조울증 덕분에 제 자신과 진심 어린 화해를 하고, 진정한 위로를 건넬 수 있게 되었으니 저는 제 병이 싫지만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