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다섯째 날의 기록(2025.1.17. 금.)
나는 이미 무너졌다. 마흔네 살의 나이에 대단한 부를 이룬 것도 아니고, 노후가 보장되는 정규직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남편이나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뱃살은 나오고, 허벅지는 굵고, 눈가에 주름은 자글자글하다.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다. 게다가 정신 상태도 정상은 아니다. 조울증에, ADHD에, 사회불안장애까지.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무너져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오늘 투어 일정에 뱅밀리아 사원이 코스에 있었다. 뱅밀리아는 무너진 사원이다. 여기의 돌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 사원은 무너진 그대로 방치된 채,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무너진 자리에 돌들이 그대로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서양인들은, 절대 복원하지 말라며 조언을 주었다고 한다. 이 모습 이대로 자연스럽다고. 실제로, 약해서 무너진 돌들이 이 사원의 특징이며 무너진 모습이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돌무더기를 이루고 있는 사원의 모습이, 마치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사암처럼 한없이 약해서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나는, 강하지 못하다. 나는 약하다. 영악하고 강해야만 살아남는 이 세상에서 나는 한없이 약하다. 야물지도 못하고, 끈기가 있지도 못하고, 똑똑하지도 못하고, 독하지도 못한 나는,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다. 내가 언제 한때는 사원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나는 무너져 내린 사암은 아니었나.
나를 복원하는 일은 나답지 못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무너지기 쉬운 사암이기에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내가 굳이 강해지겠다고 두 주먹 불끈 쥐어 봐야 얼마나 나아질 수 있을까. 어쩌면 무너진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무너진 돌의 모습에 사람들이 더 찾는 사원이 된 뱅밀리아 사원처럼, 나의 무너짐이 어쩌면 당신에게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너진 사원, 나를 찾는 당신은 뱅밀리아를 찾는 관광객일지도. 찾는 이가 적어 조용하고 한적한 뱅밀리아 사원처럼, 비록 찾는 이가 적을지라도 무너진 모습 이대로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처음부터 굳건하고 강건 했던 사원인 척 복원하기보다는, 무너진 채로 당신을 마주하고 싶다.
비록 무너진 사원일지라도, 당신이 찾아와 준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나는 행복한 뱅밀리아 사원이 되고 싶다.
나는 무너져서 행복한 뱅밀리아 사원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