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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C Sep 28. 2022

22.굿바이! 하와이..

하와이에서의 마지막 기록

마지막으로..


너무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미국 생활은 아들녀석 교육에도 문제를 가져왔다. 학제가 서로 반 학기가 엇갈려 가기에 한국 복귀 후 특례 적용을 받으려면 한 학년을 올려서 입학을 시켰어야 했는데 부임초 너무 바빴던 탓에 이리 저리 정보를 수집할 시간도 없었고,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걱정되어 입학 처장의 “어느 학년으로 입학을 시킬래?” 라는 질문에 5분간 고민 후 한 학년 아래로 내려서 입학시키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고, 그 순간의 선택이 3명 구성원 중 한 명인 아들을 이산가족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쩌면 내 인생에 제일 크나큰 판단 실수라고 생각하여 엄청난 죄책감에 사로잡힌 결정이기도 하다.


한 학년 아래로 입학하면서 한국 복귀 시점에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치지 못한 상태가 되니 특례 적용 대상이 되지 못했고, 중요한 시기를 지나쳐 한국 교육을 따라 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장고 끝에 14살의 아들을 홀로 미네소타주의 한적한 시골마을 학교로 유학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귀임 9개월 전인 2015년, 미네소타주 Fergus Falls의 이름 모를 시골마을 기숙사 학교에 입학 하게 되었고 평생 처음으로 1주일간의 휴가를 신청했다. 우선 아내와 아들 녀석은 한국에 부모님께 인사 보낸 후 바로 뉴욕편 항공기를 탑승할 수 있게 여정을 계획하였고, 나 또한 며칠 후 하와이발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으로 직원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연락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고서..


뉴욕의 가을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오랜만에 즐기는 가족여행도 행복했지만, 여행 첫날 저녁 맨하탄 변두리에 있는 이름 모를 식당에서 식사 겸 맥주 한잔을 하며 우리 부부는 어린 아들과의 이별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 백인 여종업원은 세 가족의 눈물을 보고 사연을 알 수도 없었겠지만 아무 말 없이 서빙을 해주었고 새로운 맥주를 시키자 슬며시 잔을 치우고 새로운 잔을 가져다 놓으며 “이건 내가 대접하는 거야.”라며 조용히 뒤돌아섰다.


그날은 그 여종업원이 너무도 고마워 미국생활 중 가장 많은 팁을 내고 식당을 빠져 나온 것 같다.


워싱턴 D.C.의 대학친구집에서 또 다른 대학 친구 식구와 더불어 세 식구가 추억어린 저녁을 함께 하고 미니애폴리스로 가는 비행기를 탔으며 그 곳에서 렌터카로 거의 5시간을 운전해서 Fergus Falls로 향했다.


수 없이 많은 여행을 해 보았지만 나에겐 그 여정이 마지막 같이 느껴졌다.


렌터카를 운전해서 학교로 가는 긴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어두운 표정으로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서류접수를 하고 교정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도 하며 월마트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고 기숙사 방의 고장난 수건 걸이 등을 고쳐 놓은 후 밤새 그 녀석이 4년여간 덮고 잘 이불을 빨아 건조시키고 옷도 세탁하여 고이 접어 넣어 주었다.  


처음 보는 또 다른 한국인 유학생과 함께 이른 점심을 먹이고 떠나오던 순간, 아들 녀석이 가면서 읽어보라고 쿨하게 차 안으로 편지 두 장을 던져 넣었다. 그 곳을 떠나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학교 운동장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언저리에 도착했을 때 아내에게 부탁을 했다. 여기서 잠시 머물렀다 가면 안되겠냐고..


비행기 시간에 쫒기고 있었으나 학교를 내려다 보며 아주 천천히 담배를 피웠고 눈물을 꾹 눌러 참은 채 미니애폴리스 공항으로 다시 힘든 운전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달렸을까 갑자기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아내가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들이 전해준 편지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엄마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는 가슴이 미어졌다. 나에게 써 준 편지는 ‘존경하는 아빠에게’로 시작했는데 우리 부부는 그 누구도 보거나 들을 수도 없는 60마일로 달리는 차 안에서 그간 살아온 인생의 눈물의 양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다시 자책했다. ‘나의 잘못된 결정으로 14살의 어린 아들을 평생 처음 가보는 미국 북부의 시골 한켠에 외롭게 내버려두고 오게 되었구나. 너무도 빨리 부모 품을 떠나게 만들었구나.’ 라고..


누구는 유학을 보내서 좋겠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가족은 한 공간에서 생활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다른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이후 하와이 생활은 새로운 영역인 영업과 화물을 배우느라 나름 또 바쁘기도 했지만 쉬는 날은 다소 무료하게 보내고 둘이서만 영화를 보러 가거나 하와이 구석에 위치한 한적한 로컬 골프장에서 스팸 무스비에 맥주 한 캔을 들고 무지개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새끼를 먼 곳에 떠나보낸 어미 강아지마냥 어떤 것도 즐겁고 행복하지 않았다. 업무도 예전처럼 그렇게 열정적으로 할 수 없었다.


 귀임 직전엔 건강도 좋지 않았고 얼이 빠져 있어서 호놀룰루 총영사관에서 주는 감사패 받는 약속 시간을 놓친 적도 있었고, 현지 지인들과의 마지막 식사자리마저 이런 저런 핑계로 거부했다.


2016년 6월 30일 복귀하는 그 날.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지난 4년 1개월여간 겪었던 모든 일들이 머리 속에서 맴돌며 감정의 실타래가 쉽게 풀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정든 집 내부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현관을 지나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직원의 차를 얻어 타고 호놀룰루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이미 새로운 지점장님이 도착한 상태라 할 일은 없었지만 공항에 익숙해진 몸이 유니폼을 입고 다시 뛰면서 무언가를 해야할 것만 같았다. 그 느낌을 지우려 낯익은 공항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도 하고 친해진 다른 항공사의 직원들과도 작별 인사를 나누며 차분히 감정을 정리해 나갔다.


머리와 가슴으로 한국으로의 복귀일을 상상했었던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었는지 그 당시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글로 표현하기 어렵다.


수속이 끝나고 수 많은 조업직원들과 사진을 찍고 포옹과 눈물로 마무리를 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손님이 들고 있는 5A가 찍힌 보딩 패스를 부러워했던 내가 이젠 그 좌석에 앉아 탑승교 위에서 울고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직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떠날 시간이다. 정시에 움직인 비행기는 이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하와이.


창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와이키키 해변은 너무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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