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소호 (1)
소호의 손에 들린 몇 개의 구슬이 햇빛을 부스러뜨리며 조용히 빛났다. 나는 그 구슬들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빛나고 윤기 나는 것이라면, 아침 이슬이 잔디잎에 맺혀 있거나 누군가의 이마 위로 살며시 떨어진 땀방울처럼 섬세한 것이거나…. 아니면 나를 비추는 너의 눈동자일 수도 있겠지.
“내 생각엔, 내 구슬이 제일 빛나고 윤기 나는 것 같아.”
소호는 조심스레 손안의 구슬들을 내게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구슬 내부에는 마치 우주의 신비를 품은 듯한 독특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태양의 빛살이 그 구슬들에 반사되자, 그의 말은 진실로 다시금 살아나는 듯했다.
“정말 그래. 이번엔 내가 진 것 같아.”
우리는 특별한 경쟁을 벌이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아무도 진심으로 이기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선뜻 져주고 싶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러면, 가장 날카롭고 단단한 것은 무엇일까?”
소호는 벽에 기대 생각에 잠겼다. 시선은 바닥과 문턱,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굴러다니던 낡은 축구공까지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말없이 눈을 깜빡였고, 나도 미간이 절로 접힐 만큼 진지하게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건 담당 선생님의 목소리야.”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마치 얇은 유리잔을 울리는 소리처럼 청명했으나 이내 금세 사라졌다. 다시금 잔잔한 공기가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고, 웃음의 파장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잠시 후, 소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의 표정과는 어딘가 결이 다른, 마치 내부의 것이 잔뜩 드러난 표정의 얼굴이었다.
“아, 내가 생각하기엔… 내 손톱이지.”
그 말은 미소의 형식을 띠었으나, 실은 자신을 조롱하는 자학적인 흉터처럼 가늘고 날카롭게 들렸다.
나는 그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피부 위로 불쑥 솟아오른 뼈마디, 그 끝에 붙은 손톱은 종잇장처럼 얇았다. 부러지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처음부터 상처받는 용도로 자란 것 같은 질감. 나는 소호의 손가락 끝을 천천히 쓸어보며, 그의 극명한 뼈마디의 굴곡을 느꼈다.
“네 손톱이 날카로운 건 맞는데, 단단하진 않아.”
소호는 약간 섭섭한 음색으로 내 말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그래, 이번엔 네가 이겼어. 다음 문제는 네 차례야.”
그가 시선을 보냈고,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침묵을 깨고 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거?”
그의 대답이 먼저 나왔다.
“호수”
거의 동시에 나에게서도 같은 말이 떨어져 나왔다.
“나도, 호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방 안을 조용히 채우고 있었다. 따스한 빛줄기가 공기 중을 가로지르며 무중력 상태처럼 떠다니는 먼지들의 유영을 드러내고 있다. 그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며 물속에 있는 작은 생명체처럼 부드러운 몸짓처럼 보였다. 이곳에 먼지가 이렇게나 많았나? 햇살은 소호의 흉부 위로도 떨어져, 들고나는 숨결에 따라 빛과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소호와 나는 서로 어깨에 기대 머리를 포개어 앉아 있었다. 조용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소호의 숨결이 내게로 전해졌다. 어깨가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소호의 발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핏기 없는 정강이가 흰색의 반목 양말 위로 드러났고, 바지 주름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이번에는 소호의 갈비뼈 사이를 가르는 흉부가 보였다. 흉부가 들떴다가 줄어드는 규칙적인 리듬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옷 위로 드러나는 확실한 명암은 한순간에 생과 사를 유기적으로 연결된 개념으로 이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을 밀어냈다.
어깨선을 따라가다 보니 소호의 상부에 박혀있는 쇄골을 보았다. 단단하지만 여린 윤곽이었다. 그러나 그 안엔 깨지기 쉬운 공허가 있었고, 나는 그를 부러뜨리고 싶다는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그 순간 나의 반대쪽 어깨 근육이 늘어나는 바람에, 결리는 듯한 통증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소호의 무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들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소호는 나의 움직임에 동요하여 다시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벽에 닿은 척추뼈가 일일이 아팠다.
그때 불현듯 내 시선이 창문 쪽으로 향했다. 무심한 눈길이 멈춘 곳엔 알록달록한 큐브 하나가 햇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색색의 면이 반사된 빛은 강하게도, 혹은 기묘하게도 눈을 찔렀다.
“이건 또 뭐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큐브를 집어 왔다. 몇 번 돌려보다가 멈췄다. 소호는 작게 웃었다.
“설명서 있는데.”
“줄래?”
그는 책장을 뒤지다가 얇은 종이 하나를 건넸다. 나는 설명서를 받아들고 다시금 블록들을 교차시켰지만, 맞춰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공식이 이렇게 많아?”
소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나도 못 맞춰. 귀찮아졌어.”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그 말이 공기 중에 맴돌았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이 오후를 천천히 흘려보냈다. 나는 소호 옆에 누웠다. 천장의 전등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어쩌면 천장 전부가 우리의 존재를 납작하게 뭉개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 불안도 오래가진 않았다. 창밖의 새소리가 들리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웃음을 지었다.
내 옆에서 잠이 든 소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소년은 섬세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소호의 속눈썹을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그러자 밟힌 개미처럼 눈두덩이가 꿈틀거렸다.
“호수에 갈까?”
“좋아.”
나의 속삭임에 깨어난 소호와 나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겉옷을 챙겨입었다. 우리는 손에 하나씩 커다란 나뭇가지를 줍고 나무들을 해쳐 숲으로 향했다. 공기를 가르는 바람이 한 점의 무게도 없이 스쳐 지나갔다.
이상하게도, 소호 앞에서만은 모래성처럼 무너지던 나의 말투가 단단하게 조립되는 것처럼 능통하게 말문이 트였다. 익숙하던 외피가 미끄러지듯 벗겨지고,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닐까. 그러한 생각은 되려 내가 가진 잠재적인 매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탈바꿈했다. 하필 그의 앞에서만 정돈되는 걸까? 다만 그 의문은 자학적인 회오로 번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허공에 존재하는 실체와도 같은 것, 예로 구름을 만지는 촉감이 폭신하게 느껴질 것이라는, 마치 환영을 실체화한 듯한 생각이었다 나에게도 이러한 면이 있다… 그것은 나조차도 의심하던 가능성이었기에, 더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
나는 언제나 껍질 속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그 껍질은 두려움의 방패가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택한 꽃망울 같은 것이었다. 그 안에는 아직 피지 않은, 세상이 모르는 무언가가 자라고 있다. 소중한 것은 늘 깊은 곳에 감춰두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 내가 온전히 피어나는 순간—세상은 얼마나 놀라게 될까?
그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나는 자신에 대하여 심혈을 기울이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하얀 눈송이들이 무겁게 내려앉아 세상 모든 소리가 잦아든 어느 눈 내리는 겨울밤이었다. 보육원의 아이들은 새로 들어오는 아이들 앞에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감추려는 듯, 괜히 목소리를 높이고 괜히 날을 세우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한 소란스러운 광경을 참을 수 없이 괴로워하던 내가 평소라면 절대 가보지 않았을 그 현관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평소와는 다른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소년들의 명징한 사냥의 낌새. 첫 추락 이후로 나는 것이 두려워 바닥에서 허덕이는 어린 새를 구두로 짓밟는 행위를 목도한 것이다. 나는 몸을 숨기고 몰래 틈새로 바라보았다.
그는 바람의 간섭에도 굴하지 않고 홀로 낙하하는 낙엽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낙하하는 낙엽. 살아있는 존재들은 자각하지 못할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도 그는 죽음과 생을 동시에 발견했다. 가지에 붙은 잎은 앙증맞은 잎사귀이고, 그와 분리된 잎은 낙엽이 된다는 것.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잎으로 전달받는 생명의 메커니즘을 그는 누구보다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깨달음은 곧 인간에게로 번졌다. 한순간에 심장을 멈추면 산 자는 죽고, 태어나기 위해서는 죽음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는 것. 그는 죽음과 삶을 하나로 여기고 있었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혼란스러운 소란들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고, 그러한 그의 태도에서 아이들은 그 무심함이 마치 도발처럼 느껴져, 더욱 날이 선 심술을 부렸다.
그가 이러한 생각에 자신의 철학을 덧붙이는 것은, 그의 삶에는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에 관한 생각이 관념처럼 따라다니는 이유…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바짓단 아래로 살짝씩 보이는 선홍빛 멍이 이미 모든 내력을 웅변하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현관에 서서 담당 선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추운 겨울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가 입은 것은 감색의 줄무늬로 된 얇은 티셔츠와 검정 바지가 전부였다. 주변의 소란을 잠재우는 것은 담당 선생의 등장이면 충분했다. 아이들은 재빨리 각자의 방으로 몸을 숨겼다. 누군가를 따돌리는 것은 보육원에 있어서는 안 되는 금기였기 때문이다.
그를 잠자코 보던 나는 미처 몸을 숨기지 못하여 그와 눈을 맞추게 되었다. 그의 눈에서 흐르는 정교한 살기, 말하자면 세상을 향한 절규가 담긴 날것의 살기를 보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한쪽 눈썹을 들썩이다가 찡그렸다. 팽팽한 긴장감 속, 나는 다시 한번 눈을 먼 곳으로 보냈다가 그를 다시 응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의 눈썹이 들썩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에게 먼저 미소를 건넸다. 돌아오는 그의 미소는 부드러웠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생애에 처음으로 친구가 생긴 순간을 맞이했다.
보육원에서 소호를 제외하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 역시 그들에게 애정을 구걸한 적은 없지만, 그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실로 기이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웃으면 비웃었고, 울면 비열하게 키득거렸다.
만일 내 운명이 ‘서러움’이라는 단어 하나로 족히 정의된다면, 오히려 그 단순함에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서글픔조차도,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내게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이 곧 내 삶이라 규정되는 순간, 나는 되려 묻고 싶어진다. 왜 하필, 이 옷이 내 것이어야 했을까?
세상은 양지와 음지로 나뉜다지만, 내 자리는 언제나 그늘이었다. 누군가는 당연히 누리는 햇살조차, 왜 내겐 그림자만 들러붙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빛을 본 적이 없다. 빛은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을 뿐, 한 번도 나를 비춘 적 없었고, 나는 그 긴 그림자의 바닥에서 기는 법밖에 배울 수 없었다.
부조리와 악의, 그리고 배리(背理)의 희생양.
나는 이쪽에 있고, 너는 저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