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소호 (2)
……소호와 나는 숲을 자주 드나들었다.
우리는 햇살 아래를 누비며 뛰어다녔다. 태양에 반사되는 물빛의 호흡을 따라서 이따금 먼 곳으로 향했다. 발끝이 닿을 때마다 튀어 오르는 풀잎들의 윤슬, 짙푸른 이끼가 깔린 바위틈에서 번뜩이는 물방울, 뜨거운 태양 아래 쏟아지는 나뭇잎들의 그림자가 땀에 젖은 피부를 스쳐 갔다.
우리는 종이배를 접어 물 위에 띄우곤 했다. 종이배의 갑판이 물에 젖기 전에 먼저 호수까지 뛰어갔다. 나는 소호보다 앞서, 허공에 두 팔을 뻗어 무성한 가지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주변은 인간의 손을 타지 못한 풀들이 질서도 없이 마구 자라나 있었다.
나는 순서도 없이 자라는 풀들 속에 파묻힌 숲이 좋았다. 이 세상에서 숲처럼 무질서한 것들이 질서정연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숨을 들이쉬자, 이파리들이 부서지는 듯한 향이 폐부를 타고 흘렀다. 그때, 소호가 한참 뒤에서 외쳤다.
“기다려!”
그러나 나는 그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승리욕이 일었다. 소호는 단 한 번도 이 놀이에서 나를 이긴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미 종이배는 물에 잠긴 채 무기력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호숫가에 도착한 우리는 한동안 물에 비친 세계를 바라보았다. 호수 표면 아래로 스며든 물빛의 결이 희미한 빛의 잔상을 남겼다. 소호는 젖은 풀 위에 주저앉아 손가락으로 흙을 헤집었다.
“뭐해?”
“지렁이 잡아. 여기봐봐! 엄청 많아!”
소호는 손가락으로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뽑아 올렸다. 축축한 점액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듯 흘렀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징그러워…. 이러다 죽으면 어떡해.”
“죽지 않아.”
소호는 짧게 대답하곤, 다시 땅을 헤집어 그 벌거벗은 살덩이를 흙 속에 묻었다.
“살아있는데 왜 묻어줘?”
“원래 여기서 살잖아. 지렁이는 땅에 안 묻혀있으면 죽어.”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흙 속으로 사라진 지렁이를 눈으로 따라갔다. 어딘가 어설프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소호의 손길 때문인지, 지렁이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나름의 존엄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지렁이는 땅 위에선 죽고, 땅속에선 산다.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그 문장이 나의 귀에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인간은 평생을 지상에서 살다가 죽음을 거치고 나서야 땅속으로 몸을 이관시킨다. 어째서 그런 걸까? 지면의 경계를 두고 대립하여 살아가는 존재들의 최종적 발인식은 서로의 생으로 나아가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서로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것으로서 유기적으로 만물은 연결되어 순환한다.
나는 잠시 어지러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 삶이라 부르지 않는 곳에 삶이 있는 일이 현실에서 가능한 것처럼, 세상의 이치가 우리가 익히 아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면?
가령 ‘아름다움’이란 것도.
심장이 뛰는 일도 두뇌의 지시일 뿐인 것처럼, 내가 느끼는 감정 역시 상명하복의 지시에 따르는 군인의 숙명을 띠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두뇌가 고장 나면, 아름다움도, 슬픔도, 모두 사라지겠지. 아름다움은 그저 공상에 불과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내내 이 호수를 바라보았다. 숲의 녹음과 어우러진 이 정경은, 내 안의 어떤 것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감각. 시선으로 받아들여 심장에서 점철되는 일련의 과정은 숙달된 탐미의 습성을 더욱 짙게 했다. 내게는 이 숲과 어우러진 호수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여겼다.
너른 농람(濃藍)으로 흩어지는 물빛이 표면을 둥글게 와해시켰다. 소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진흙 위에 주저앉아 있었고, 내 손은 물속에서 괜히 허우적거렸다. 자연을 만끽하는 그림 같은 순간이었지만, 정작 우리는 서로를 거의 잊은 채 따로따로 있었다.
하늘은 어느새 잉크처럼 퍼져나가더니, 제법 짙은 밤으로 바뀌고 있었다. 호수는 밤이 깊어질수록 유랑하는 별들의 목적지가 되어주듯,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잉어 한 마리가 몸부림치자, 물과 돌이 맞부딪히며 치근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서지는 여울 위로 벌떼처럼 조여졌다가 다시 넓게 유영하는 철새들의 비행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졌다. 물결에 아른거리던 푸른 광의 달이 유난히 푸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흔들리는 구름이 호수를 겨누고 있던 달을 가렸다.
그 순간, 내 얼굴 위로 몇 가닥의 푸른 그림자가 유리 조각처럼 흩날리며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것은 가벼운 흔적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고, 불에 그슬린 비단처럼 피부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나는 영혼 깊숙한 곳까지 간질이는 듯한 전율을 느꼈고, 그 즉시 재채기를 터뜨렸다.—이렇듯 자연은 때때로, 의도 없는 폭력을 행사한다.
달이 구름 뒤로 숨어들자, 내 기침도 따라 숨죽였다. 나는 얕은 숨을 들이켜며, 물결 위로 추락하던 달빛을 떠올렸다. 마치 격랑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가녀린 빛줄기 한 가닥이 고요한 물결에 내려앉듯, 나는 서서히 본래의 숨결을 되찾았다. 눈을 감아도 물에 낙하하는 달의 추락사가 보였다. 그것은 불상사인 듯하면서도 자의적인 죽음이었다.
“그만 가자.”
밤은 낮과 대비되게 서늘함까지 쥐고 있어, 그 위협이 어디서 도사릴지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소호와 나는 어두운 숲을 헤치고 다시 보육원으로 향했다. 우리는 둘이서 몰래 담을 넘고 창문으로 들어갔다. 모두 잠이 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