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소호 (3)
…눈을 감았다. 깊어지는 밤, 창문은 열려 있었고, 방 안엔 풀잎을 비틀며 스며드는 봄의 바람이 어른거렸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조심스레 타고 올라가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위층 침대에서, 소호는 아래층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소호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살짝 열린 입술이 아직 잠들지 못했음을 일러주었다.
“자냐?”
“응.”
“자는데 어떻게 대답해?”
“그냥….”
“내일은 뭐 할까?”
대답은 없었다. 나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소호는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셔츠 자락이 말려 올라가 옅은 피부가 얇게 드러나 있었다. 나른한 봄밤의 숨결은 커튼을 스치고, 커튼은 그에 화답하듯 잔잔한 숨결로 나부꼈다. 방 안은 조용했고, 그 고요가 오히려 마음을 어지럽혔다.
나는 이불 안에서 몇 번이고 뒤척였다. 잠이 오지 않았다. 불편한 생각만이 머리를 짓눌렀다. 손이 얼굴을 더듬었을 때, 이질적인 감촉이 손끝에 걸렸다. 미세한 통증과 함께 뭔가가 튀어나와 있었다. 둥근 종기였다.
그것은 한낱 모기 자국과는 달랐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톱 끝을 세워 종기의 중심을 눌렀다. 미련하게도 그게 없어질 거라는 믿음에 기초한 행동이었다. 살갗 아래로 느껴지는 묘한 단단함, 그리고 지연된 통증이 차분히 번졌다.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그 감각은 울음인지, 단순한 반사작용인지 애매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낡은 벽지 위에는 얼룩들이 퍼져 있었고, 그것들은 마치 오래전 누군가의 악몽이 형체 없이 엉겨 남긴 자국 같았다. 그 안에서 검은 점 하나가 꿈틀거렸다.
거미였다.
거미는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거미줄을 짓고 있었다. 여덟 개의 가느다란 다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정교한 실뜨기를 이어 나갔다. 처음에는 그것이 일정한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복잡한 형상이었다. 나는 천천히 입김을 불었다. 가느다란 거미줄이 흔들리며, 거미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녀석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위기를 이미 예견한 것처럼, 줄을 움켜쥐고 침착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그 태연한 태도가 신경에 거슬렸다. 나는 더 강한 숨을 불어보았다. 거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숨을 내뱉었다.
드디어 거미줄의 한 부분이 찢어지자, 그제야 거미는 다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망적으로 끊어진 줄을 더듬으며, 망가진 곳을 복구하려 애썼다. 나는 희미한 성취감을 느끼며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상처 입은 거미의 몸체 위로 내 침방울이 몇 개가 올라가 있었다. 그 주변의 거미줄에 유리 파편처럼 맺힌 투명한 물방울들이 보였다. 그 위로 구름이 걷힌 건조한 달빛이 반사되자,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찰나의 빛 속에서 문득 내 모습이 비쳤다.
볼에 달라붙은 종기, 그리고 그와 엉겨 붙은 더러운 침방울. 그것이 거미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괴롭힘을 당한 거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시선을 거두었다. 내밀한 성취감은 온데간데없이 소멸했다.
그때, 창문 너머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섞여왔다.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으나, 그 소리는 점점 선명해졌다. 지독한 악몽을 반복해서 꾸는 사람처럼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귓가에 바싹 다가선 목소리들이 날카롭게 휘몰아쳤다.
“괴물 같은 놈! 기분 나쁜 녀석!”
“그 종기는 심술주머니냐! 징그러워!”
말들은 낡았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 묘연하게 편안함 같은 것을 느꼈다. 간혹 병자가 자신의 병과 친숙해지는 원리와 비슷했다. 아픔은 둔해진 지 오래였다. 나도 이제 그 말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쪽에 가까웠다. 부끄러움 대신 익숙함, 상처 대신 관성. 쓸쓸함과 적막함은 질서정연하게 쌓여, 나의 삶을 매끈하게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밤에 유난스럽게도, 나는 분명히 떨고 있었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괴로워하는 자신, 그리고 그 주위를 둥글게 둘러싼 사람들. 그들의 눈빛이 하나로 포개지더니 단 하나의 거대한 눈처럼 변했다. 그중에서도 하나의 눈동자가 내 종기에 달라붙었다. 번들거리는 흰자위와 이글거리는 동공이 끈적하게 피부 위를 타고 흘러내렸다. 마침내, 얼굴에는 더 이상 종기가 아니라 끔찍한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악몽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매끄럽게, 나를 향하여 열리고 있었다.
—숲속이었다. 어디쯤인지 알 수 없었다. 발은 진창에 빠진 것처럼 무거웠고,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자꾸 발목을 긁었다. 몸을 끌고 가던 끝에 결국 힘이 빠지는 바람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마치 무너지는 지붕 아래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울음은 의식적이지 않았다. 그냥 새어 나왔다. 나는 예고 없이 흐르는 눈물이 그 자신으로서도 용납되지 않았다. 어째서 어머니는 늘 이런 순간에, 이토록 혼란스러움을 틈타 내 안을 휘젓고 있는 걸까? 그 손짓 한 번으로 세찬 비가 잦아들고, 진창 속으로 빨려들던 발목은 거두어졌으며, 엄숙한 달빛이 옥죄는 사슬 형태의 목줄은 깨졌다. 그 비밀스럽고 마법 같은 손이 순식간에 눈앞의 풍경을 유락의 대지로 둔갑시켰고, 그 안락한 언덕 위에 나를 올려놓고 섬세한 기쁨을 선사하고 있었다. 어머니와의 유대는 나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마치 하나의 푸른 나팔꽃이 된 것 같았다. 수많은 밤이 거듭될 때마다 두뇌 한구석에서 어떠한 줄기 같은 것이 길게 뻗어 나오더니, 어느 정도 자라난 그 줄기가 자신을 지지해 줄 기둥을 찾느라 헤매는 순간에 절묘하게 가까워진 담장에 몸을 감싸듯이. 나를 움직이는 건 내 다리가 아니라, 촘촘하게 연결된 그 아득한 순간들을 초월하는 운명의 순간들이었고, 도착한 곳에는 늘 어머니가 있었다. 내 이파리 하나하나가 몸을 떨며 그녀에게 향하고 있었다.
언덕에 고스란히 피어난 풀들이 발을 간질였다. 때로는 저 하늘에 태양이 저물었다가 다시 떠올랐고, 그 사이를 메우는 것은 온전히 태양의 부재를 대변하는 달이 전부였다. 말하자면 태양과 달, 불과 물, 빛과 그림자의 대비되는 간극은 서로의 존재로서 탄생하는 것과 같았다. 이번에는 어떠한 운명적인 것이 점차 박혀 들더니 내 안에서 어떤 깨우침을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나는 여러 종류의 철학이나 사상, 과학과 예술들을 떠올렸으나, 끝내 어떠한 하나의 생각으로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탐험적인 예술가이자 백일몽을 꾸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작업이었다.
평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은한 채광처럼 비춰들던 그 형체는 다름 아닌 내 앞에서 일정한 박동으로 숨을 쉬는 인간과 유사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신성한 곳에서 누군가의 기도를 듣고 일일이 들어주려는 수호자와 같은 후광이 그 몸을 감싸느라 과연 인간은 아니라는 사실은 인식하고 있었다. 그 우아하고 밝으며 정교하고 따스한 손이 나를 품에 안았다. 그 존재는 나를 꼼짝 없이 그 안에 가두었다. 나는 하나의 고치가 되어 있었다. 그 손길은 나를 끊임없이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그 손길을 피할 겨를이 없었다.
저편에서,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물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왜곡되고 부드러웠다. 여자 목소리였다.
“괜찮아. 네가 걷지 못하면, 내가 널 안고 갈게….”
이 목소리는 늘 그랬다. 악몽에 몸이 묶일 때마다 틈을 비집고 스며들었다. 마치 녹초가 된 밤을 위해 데워놓은 따뜻한 우유가 혀끝에 처음 닿는 순간처럼 안온했다.그러나 마신 뒤에는 그것만큼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은 없다.
따뜻한 손길이 얼어붙은 발을 감싸고, 입김이 서린다. 차가운 피부가 서서히 녹아가는 감각…. 한기와 체온이 맞닿는 순간, 감각은 어떠한 피상적인 것보다도 격정적이고 날카롭게 일그러졌다. 오래된 물집이 터지듯, 혹은 오래 참고 있다가 문이 열린 방 안의 숨결처럼, 익숙한 감정이었지만 무엇이라 칭하기란 늘 어려웠다. 기쁨일 리 없고, 슬픔이라 하기도 애매했다. 그러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눈물이 나의 것인지, 나를 품에 안고 있는 자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착각은 피로할 만큼 섬세했다.
슬픔은 꿈보다 선명했다. 어떤 명확한 색도, 형체도 없었지만, 그것만큼 또렷한 것은 없었다. 마치 자기장을 따라 움직이는 나침반처럼, 강렬한 감정이 나를 이끌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 끌려가고 있었다.
거칠게 몰아쉬던 숨이 차츰 잦아들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지친 기색으로 별도 없는 까만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소란스러운 상념에 휩싸여 한순간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한 채 밤을 견뎠다. 그러다 불현듯,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는 어느 순간에야 비로소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다시 눈을 뜨면 세상은 언제나 환한 아침으로 단숨에 뒤바뀌어 있었다. 마치 밤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어째서일까. 밤의 번민은 끝없이 이어질 듯 어둠 속을 유영하다가도, 아침이 오면 태양은 지나치게 뜨거운 광채로 그것을 짓눌렀다. 밤의 사색은 그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단순한 잡념으로 변질되었다. 나의 밤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끝없는 생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다 문득 어느 순간 의식을 잃고, 정신을 차리면 이미 아침이었다. 그렇게 밤새 곱씹던 생각들은 아침의 열기에 녹아내리고, 그 자리를 다시 평범한 하루가 채운다.
눈을 뜨자 볼에는 흥건한 눈물이 만든 길의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금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를 타고 자연스레 흐른 눈물이 베개를 젖게 했다. 창밖의 저 멀리서 떠오르는 태양이 보였다. 그러자 그 열기에 금세 몸에 생기가 돌았다. 나는 찌뿌둥한 몸으로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삐걱거리는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와 밖으로 나가려는 문손잡이를 잡기 전, 아래층 침대의 소호를 내려다보았다. 소호는 여전히 꿈속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