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소호 (4)
—보육원 시절.
한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흔히 떠올리는 소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조용한 온순함이나 나약한 우아함 따위는 애초에 소녀의 본성과 맞지 않았다. 소녀의 존재는 언제나 움직임과 소리로 충만했고, 그 생동감은 주위까지 물들였다. 친구들은 소녀를 중심으로 모였고, 소녀는 선천적인 권위라도 지닌 듯 사람들을 이끌었다. 보육원에서 제공하는 변변찮은 식사조차 태연히 받아들이며, 허기조차도 하나의 놀이처럼 즐겼다.
소녀는, 실은 고아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없었으나, 어머니는 존재했다. 그러나 그 어머니란, 유흥과 환락의 조류 속에 휩쓸려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소녀는 버려진 것도, 그렇다고 온전히 길러진 것도 아닌, 모호한 경계 속에서 자라났다. 그리하여 소녀는 홀로 있는 시간의 공허를 채우듯, 사람들과 뒤섞이고 부대끼는 일을 삶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소녀의 태도에는 선천적인 대범함이 스며 있었다. 소년들 사이에서도 조금의 위축됨 없이 섰고, 오히려 더욱 거침없이 무리를 지휘했다. 소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으며, 한 번 울려 퍼지면 공간을 가득 채우는 울림이 있었다.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이하는 것도 소녀였고, 어김없이 모두를 깨우고, 사감이라도 된 듯 아침 식사 자리에서 질서를 잡았다. 규칙을 어기는 아이들에게는 타이르는 말조차 필요 없었다. 강단 있는 시선 하나면 충분했다.
또래보다도 큰 키, 유난히 길고 균형 잡힌 팔다리. 몸을 움직이는 동작마다 군더더기 없는 정확함이 있었다. 운동장에서 소녀는 누구보다도 날렵하게 움직였고, 몸으로 부딪치며 싸울 때조차 망설임이 없었다. 소녀를 가벼이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소녀는 다른 학교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존재였다. 몇 번의 패싸움 전적이 있었고, 그 흔적은 소녀의 몸과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어른들이란 존재는, 소녀가 그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터득한 순간부터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었다. 상담 과정을 거친 뒤, 그들은 마치 소녀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소녀는 말을 조리 있게 하고, 생동감 넘치는 활기로 대화 속을 가득 채웠다. 소녀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깃들어 있었고, 그것은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마력과도 같았다. 결국, 누구든 소녀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보육원의 창문 틈으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를 우연히 주워 담았다. 소녀는 담당 교사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방에 아무도 없어서 너무 힘들어요. 제 방에 세 명 정도 친구들을 넣어주세요. 불편해도 상관없어요. 누구든지요.”
잠을 잘 때에도, 학교에서도, 소녀는 언제나 무리를 거느렸다.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친구는 자신을 꾸미는 장식과도 같았고, 그녀는 그들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사랑했다. 건너편이 여자아이들 방이었기에 소식이 자주 전해지지는 않았으나, 단 한 번, 기억에 각인될 만한 사건이 있었다.
그날 밤, 소녀는 방을 홀로 차지하고 있었다. 깊은 밤의 어둠이 보육원의 낡은 벽을 스며들 듯 감싸고 있을 때, 갑자기 공기를 찢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명은 한순간의 외침이 아니라, 공포에 사로잡힌 혼령이 내지르는 울부짖음 같았다. 보육원의 모든 아이가 꿈결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복도를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이어졌고, 문득 열린 교사실의 문 안으로, 소녀가 뛰어 들어갔다.
소녀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한쪽으로 젖힌 채, 숨을 몰아쉬며 울고 있었다. 한순간, 실내를 감도는 불길한 정적. 그리고 마침내, 소녀의 입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토해내듯 내뱉었다.
“귀신이 있어요! 선생님 살려주세요…”
모두가 놀랐지만, 소녀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꽤나 인상적인 경험으로 남았다. 타인을 괴롭힐 만큼 자신만만하던 그 호기로운 소녀가 실은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성숙한 외양과는 달리 겁이 많아, 그 나약함을 감추려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단순한 연기인지, 아니면 본능적인 몸부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알겠어. 일단 진정하렴.”
“같이 가주세요. 정말 있다구요……”
소녀는 자기 등을 두들겨 주는 선생을 의지하며 방으로 향했다. 그런 소동 같은 새벽이 이 소녀의 진정한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든, 그 밖의 세상에서든, 소녀는 무리와 함께 있을 때 더욱 대담해졌다. 본능적인 습성처럼, 인간은 무리를 이루면 더욱 용맹해지고, 때로는 광포해진다. 그것이 비록 악행이라 할지라도, 무리를 더욱 결속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소녀는 거기에 주저 없이 몸을 맡겼다.
그 무리는 정교하게 쌓아 올린 벽돌과도 같았다. 벽돌 사이사이를 촘촘히 메운 시멘트처럼 서로를 단단히 결속시키며 거리를 활보했다. 그들 앞에선 누구도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니,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쟤네 눈에 띄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소녀의 본심을 꿰뚫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진지한 대화를 나눈 적 없었음에도.
그들의 본심을 알아차렸다고 해서, 소녀나 그녀의 무리가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옆 학교의 아이들조차 그들이 지나가면 조용히 눈길을 거두었고, 그 호기롭게 뻗어나간 영향력은 몇 달 후 내가 다니게 될 중학교에까지 미리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미 소녀는 아는 선배들과의 연결을 통해, 앞으로의 삶에서도 군림할 수 있는 기반을 조용히, 그러나 치밀하게 다져가고 있는 듯 보였다. 사람들의 중심에 서는 삶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면, 그 앞에 무조건 무릎을 꿇는 일 또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의 이런 단면들을 조용히 바라보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살아가는 삶도 나름의 방식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속단할 수 없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지치기 쉬운, 피로한 생명이라는 감상이 문득 스쳐 갔다.
또 한편으로, 그 소녀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내 안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고 있었다. 단순히 그녀가 대범하다거나 얍삽해서가 아니었다. 나를 따돌리거나 괴롭히려는 의도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녀는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내게는 무엇보다 귀중한 그 소년을 바라보는 눈빛 속에서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시기심의 불씨를 느꼈다. 그 검은 눈동자 속에 숨어 있는 것은 깊고 탁한 우물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오래된 원혼의 기척이다…. 마치 그녀에게 사랑이란, 그 사람과 함께 파멸하는 길을 동행함으로써 완성되는 무엇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런 눈빛이 나를 더욱 소호의 곁으로 붙들어 매는 것이었고, 동시에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불결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