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혼의 입항

02. 소호 (5)

by 성빈

주말 아침에는 늦잠을 자도 상관없었다. 보육원의 일과도 평소보다 한 시간쯤 늦게 시작됐고, 선생들은 교회에 가거나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숲으로 향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며 투명한 빛줄기를 만들어냈다. 숲속을 흐르는 물소리와 새들의 노래가 조용한 공기 위로 가득 퍼졌다. 호숫가에 도착한 나는 돌부리에 걸터앉아 토끼풀을 꺾어 반지를 만들었다. 소호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작은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끼워 보았다. 적당히 맞았다.

이번엔 얇고 긴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왼손에 쥔 채 주위를 걸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까치집처럼 헝클어진 머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가 내 앞으로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상체를 숙이고 숨을 고르며 말했다.

“왜 안 깨웠어. 일어나니까 없어서 놀랐잖아.”

“내가 깨워도 넌 못 일어났을 거야.”

소호는 말없이 웃었다. 나는 손에 꽂은 반지를 소호에게 보여주었다. 잠시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내 손가락에서 빼냈다.

“내가 가져도 되지?”

묻는 말과는 달리, 소호는 이미 반지를 자기 약지에 끼우고 있었다. 그는 손등을 하늘을 향해 뻗어서 자꾸만 꽃반지를 보고 있었다.

“잘 만들었다. 다음에는 왕관이야.”

“왕관도 있어?”

“응. 근데 풀이랑 꽃이 꽤 필요해.”

“그래.”

돌다리를 건너는 소호의 뒤를 따라 조용히 걸었다. 하늘은 맑았으나, 군데군데 흐릿한 구름이 엷은 장막처럼 퍼져 있었다. 숲속의 나무들은 태양을 향해 몸을 기울였고, 아침 하늘에는 별과 달, 그리고 태양이 나란히 떠 있었다. 마치 낮과 밤이 경계를 잃고 뒤섞여 버린 듯한 풍경. 그 기묘한 조화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자아냈다.

발밑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발끝이 매끄러운 돌 위에서 미끄러지는 순간, 몸이 중심을 잃고 허공으로 휘청였다. 균형을 되찾으려는 찰나, 중력에 이끌리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축축한 흙바닥이 성급하게 달려들었고, 뼈에 울리는 둔탁한 충격이 몸을 강타했다. 날카로운 통증이 살갗을 파고들자, 무릎 위로 뜨겁고 선명한 붉은 액체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아 무릎을 감싸 쥐었다. 그제야 앞서가던 소호가 나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에 당혹과 놀람이 스쳤고, 그는 곧장 나를 향해 달려왔다.

“괜찮아?”

“응…. 아파.”

“기다려봐.”

소호는 말없이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곤 거즈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걸 어떻게 챙겼어?”

“자꾸 코피가 나서 말이지.”

그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하며 조용히 내 무릎을 닦아 주었다. 핏물은 흰 거즈에 스미며 서서히 어둡게 번졌다. 그의 손길은 조심스럽되 망설임이 없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응.”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상처가 벌어지는 느낌에 무릎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소호는 한발 물러선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뒤로 돌아봐.”

“왜?”

“얼른”

그의 말대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 역시 내 동작에 맞춰 뒤로 걷기 시작했다.

“무릎이 좀 덜 접히지 않아?”

“그런 것 같아.”

“난 넘어졌을 때 맨날 뒤로 걸어.”

나는 그를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픔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는 어쩐지 오래전부터 몸에 익힌 요령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고통을 다루는 모습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나는 잠시 그를 낯선 사람처럼 느꼈다. 마치 상처가 접힐 때마다 통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근데 조금 무서워.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어.”

“내가 다 보고 있어.”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길도, 나무도, 바람도, 풍경도……. 어쩌면 멀어지는 것은 나의 몸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일지도 몰랐다. 눈앞의 것조차 손에 닿지 않는 듯 멀리 흩어지고 있었다. 소호는 걸음을 멈추곤 뒤를 돌아보며 장애물이 있는지 살폈다.

“뒤로 빨려가는 것 같아.”

그는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장난기 어린 듯 보였지만, 그 미소는 저물녘 하늘에 걸린 새벽별처럼 희미하고 아득했다. 나는 그를 흘겨보았으나, 그는 그 시선마저도 조용히 받아넘겼다. 그의 미소는 마치 지구 어디에도 내가 발 디딜 자리가 없는 듯한, 마치 가벼이 위로 떠오르는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곧 보육원에 도착했다. 담당 선생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다른 선생이 반창고를 내밀었다. 소호는 말없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반창고를 조심스럽게 떼어내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듯 만지다가, 상처 위에 천천히 붙였다. 핏기는 거의 가셨지만, 상처 주변에는 아직 작은 핏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소호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고, 그 기척이 가까운 곳에서 어렴풋이 전해졌다.

“이제 괜찮아.”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반창고를 붙인 손길이 마지막으로 상처 위를 부드럽게 눌렀다. 나는 손을 뻗어 반창고 가장자리를 가만히 문질러 보았다.

소호는 무릎을 꿇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빛을 머금고 있었다. 문 너머로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소호의 등을 지나 이윽고 그 시선은 나에게 닿았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 어떤 이상한 무게가 가라앉았다. 저 소녀가 나의 경쟁 상대라는 사실이 멀고도 낯설게 느껴졌고, 그 감정조차 실은 실존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그를 소녀의 마음처럼 갈망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관념의 빈자리에 그가 우연히 들어맞았기 때문인지, 나는 스스로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소호는 여전히 내 앞에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내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소녀보다 반걸음쯤 앞섰다는 조용한 실감을 느꼈다. 그것은 누군가를 이긴 듯한 농밀한 우월감이었고, 동시에 나를 어딘가 더 깊은 단념으로 이끌었다. 그럴수록 그 자신의 확고한 관념이라든지 표상과 같은 이상이 현실과 맞닿았으며, 그로 인한 현실에 대한 내 환상의 추징은 더 없이 나를 비밀스러운 인간으로 탄생시켰다. 차갑고 아픈 것. 이를테면 단순한 동경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문득 생각했다. 만약 내가 소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면, 여전히 같은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을까? 이 질문은 나를 오래도록 붙잡았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본질에 관한 질문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에게 보내는 추파와도 같은 눈빛이야말로 아주 자연스럽고 평범한 것이 아닌가! 왜 나는 소녀의 눈빛, 그 설렘과 조심스러운 애정을 담은 시선에서 뜨거운 갈망과 욕망을 엿보았으며, 그로 인해 섬뜩한 감정마저 느꼈던 것일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 깊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조바심을 낳았다.

어째서 나는 저 소녀의 눈빛에서 나오는, 섬세하고도 선뜻 다가설 수 없는 애상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는 것을 소호보다도 깊게 인지하고 있으며, 그 눈빛에서 비춰드는 갈망이나 욕망을 섬뜩하고 께름칙한 감정으로 느낀 걸까? 내 애정이 향하는 방식, 혹은 사랑은 내가 그 자신을 다루기에 늘 남들과는 달라야만 한다는 강박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그 강박. 그것은 또 어디에서 내게 연결되어 나를 이토록 조급하게 만드는 걸까? 내가 소녀라면 소호를 갈망했을까? 내가 소년이기 때문에 소년을 그리워하는 걸까? 나는 달이 해를 그리워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인간은 밤과 낮으로 그들을 갈라놓지만, 실은 언제나 하늘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은 태양과 달의 속성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일종의 광막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또한, 모든 존재가 여성의 몸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성별은 오히려 나중에야 덧붙여진 외피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지금 내가 소년을 그리워하는 일은, 내 본질의 문제라기보다 감정이 표류하는 방식의 차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소녀가 소년을, 소녀가 소녀를 그리워하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단순히 소년으로서 소년을 그리워하는 기질이 있다는 것에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안에 자리한, 거대한 불가침의 성역그것이 실제로 손을 뻗어 다가올 때,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관하여 심리적인 분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역시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그는 각별한 친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나는 그 어떠한 욕망도 없는 그의 성격과 상반되는, 그러나 무수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의 섬세한 이목구비가 좋았다.

그날 새벽 소호의 코피는 예고도 없이 흘러, 또다시 힘없이 쓰러졌다. 선생님들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들은 자주 있었던 일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이 움직였다. 나는 방 안에 홀로 남아 창밖을 보았다. 저 멀리서 업힌 채 들려가는 소호가 보인다. 그의 사지가 맥없이 늘어진 채 줄에 묶인 인형처럼 팔랑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무언가 다른 것,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서 지워지지 않는 환영을 느꼈다.

저건 자신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화려한 페트루시카의 환영이다……

소호의 뒤를 따르는 저 다급한 뒷모습. 흰색의 잠옷을 입고 가볍게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머릿결. 그 소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선생들과 함께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내 손끝이 반창고에 닿았다. 팽배한 매스꺼움에, 손가락으로 반창고를 가볍게 떼어냈다. 반나절 만에 상처는 금세 아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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