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냥 살고 있던 시간

아무 일 없던 날의 대화

by Asurai

저녁을 먹고 나면

우리는 보통 소파에 앉아 TV를 켜둔다.

무슨 프로그램을 보는지도 중요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보는 일도 드물다.


“이거 볼까?”

“아무거나 틀어.”


그 말로 하루가 이어진다.

리모컨을 누르는 소리와

광고가 나오는 동안의 침묵,

각자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웃음이 새어 나오는 순간.


“이거 봤어?”

“아, 그거?”


대화라고 하기엔

너무 사소한 말들이다.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

다음 날이면 잊혀질 말들.


그런데도

이런 대화가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침묵이 어색하지도 않다.


예전엔

대화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 말이 없으면

괜히 TV 소리를 키우거나

자리를 피했다.


집에 일찍 들어가지 않았던 날들도

어쩌면 그런 이유였을지 모른다.

아무 일 없던 대화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부모님도

이런 저녁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대단한 이야기는 없고,

하루를 정리하는 말 몇 개만 오가던 시간.


“뉴스 봤어?”

“오늘 날씨 춥다더라.”

“내일 비 온대.”


그땐 그게

너무 조용해 보여서

괜히 불편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아무 일 없던 대화가

사실은

서로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는 방식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말이 많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 앉아 있고,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하루는 충분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


오늘도

별일 없는 대화를 몇 마디 나누고

각자 할 일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이 특별할 필요는 없고,

오늘을 잘 끝냈다는 것만으로

괜찮은 밤이었다.


아마 그 시절의 부모님도

이런 밤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어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던 대화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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