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냥 살고 있던 시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사람

by Asurai

어릴 때의 집에는

늘 말이 많았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말이 없던 시간들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버지는 거실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TV를 보고 있었는지,

그저 화면을 켜두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가끔 채널이 바뀌는 소리만 들렸고,

그 외에는

집 안이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그때의 나는

그 침묵이 조금 불편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굳이 물어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괜히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거나,

별일도 없으면서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말이 없는 그 시간이

이유 없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떠올려 보면

그건 답답함이 아니라

하루가 끝났다는 신호에 가까웠다.


더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할 만큼 다 써버린 하루였기 때문에

조용해질 수밖에 없던 시간.


요즘의 나도

가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순간이 있다.

TV를 켜두긴 했지만

내용이 머릿속에 남지 않는 시간.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느낌.


그럴 때면

예전의 거실이

조용히 떠오른다.


말없이 앉아 있던 사람의 뒷모습,

하루를 다 지나온 사람의 어깨.


그땐

왜 그렇게 말이 없었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있다는 걸 알 것 같다.


하루를 버틴 뒤에는

설명할 필요도,

정리할 말도 남지 않는 순간이 온다.

그저 조용히 앉아

오늘이 끝났다는 사실만 느끼는 시간.


아마 그 시절의 부모님도

그렇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포기해서가 아니라,

그날을 끝까지 살아냈기 때문에.


오늘도 잠들기 전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 보았던

그 조용한 거실과

조금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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