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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이 사라져가는 시대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나는 죽음이 삶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죽음을 떠올리면 두려움부터 엄습해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왜 그토록 죽음이 두려울까? 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사라지는 것보다 곁에 없는 나로 인해 더 고통스러워하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최근 계속해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면 나는 바로 그 부모님이 떠오른다.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자녀를 잃은 부모는 그 아픔이 너무 커서 부르는 호칭이 없을 정도라고 하는데.


요즘 우리 부모님께서도 걱정이 많으시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이렇게 불안함의 끝인 생명의  불안함까지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안타까울 뿐이다. 왜 이렇게 자신의 생명은 소중한지 알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은 귀한지 모를까.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주의 같지만 오히려 심각한 집단성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딘가에 소속되어야만 혹은 집단과 같아야만 살아갈 수 있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새 사라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장치도 고장 나버린다. 혹은 눈에 띄는 집단과 내가 다르다는 판단에서 오는 박탈감이 들기도 한다. 갈수록 각자의 취향이 중요시되고 1인 가구가 늘어난다고 개인주의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개인주의가 필요하다.


죽음 뒤에는 꼭 ‘탓’이 따라온다. 그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서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고 다 당당한 게 아니다. 그 생각이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내뱉는 말들은 독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거시적인 분석이 아닌 근본을 들여다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 근본을 들추지 않는 이상 문제는 계속 일어난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다 다르게 만들어진 이유가 있다. 그런데 세상은 그 섭리를 거슬러 자꾸 똑같이 만들려고 한다. 역사를 들여다봐도 늘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때 재앙은 시작된다. 우리가 다 다르게 지어졌어도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이유는 ‘존중’을 통해 혼자일 때보다 더 풍요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존중’이 사라져가는 시대 같다.  존댓말을 하고 양보를 하고 예의를 지키는 것만 존중이 아니다. 먼저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하고 나를 통해 내가 존중받는다고 느꼈을 때 타인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다. 세상의 크고 작은 문제 앞에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세상이 더 악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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