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세계의 초대장

by 따심토

“선배? 저 하린이에요.”
순간, 건혁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뭐?”
그와 동시에, 뒤에서 수리가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 잠깐만.”
건혁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수리를 돌아봤다.
“혹시 몸을 숨길 수 있는 방법 있어요?”
“네?”
“아무튼 가만히 있어요.”
그런데 수리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눈이 반짝였다.
“예상외 변수군요…!”
“수리 씨”
“위장 필요!”
“수리씨!”
하지만 이미 늦었다.
"메타모르포시스 아르카나!”
작은 빛이 번쩍이더니,
소파 위에는 은색 털의 햄스터 한 마리가 남아 있었다.
“… 하.”
건혁은 깊은 한숨을 쉬고 문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선배!”
문 앞에 단정한 코트를 입고, 서 있는 하린은 밝게 웃었다.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가 들러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죠?”
“아, 아니… 좀.”
건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옆으로 비켰다.
“들어와.”
하린은 방 안을 한 번 둘러봤다.
생각보다 소박한 부엌과 거실, 그리고
“귀엽다.”
테이블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햄스터는 아주 얌전히 앉아 있었다.
건혁은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키워요?”
“…어. 요즘 혼자 사니까 쓸쓸해서”
“선배랑 잘 어울려요.”
하린은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건혁은 괜히 물컵을 잡았다 놨다 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하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요. 미술 공모전 신청서예요.”
건혁의 손이 멈췄다.
“이번에 규모 큰 대회가 하나 열리거든요.
교수님도 선배 얘기하시면서 꼭 대회 나가보라고...”
“난, 생각 없어. 이제 그림도 안 그리고...”
“선배, 재능 썩히는 거… 보기 싫어요.”
건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린이 말을 이었다.
“선배, 기억나요? 제가 부모님 때문에 힘들어서 좌절하고 있을 때 선배가 찾아와서 도와줘잖아요. 위로와 함께 스케치북에 그려진 그림도 보여주고 그땐요.”
하린은 웃으며 말했다.
“선배 그림 보면, 저도 살아 있는 것 같았거든요. 저는 선배가 계속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어요.”
하린의 눈물 섞인 미소에 건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펑!
테이블 위에서 큰 소리가 났다.
햄스터가 휘청였다.
“어?”
빛이 새어 나왔다.
“어, 어?”
건혁이 일어서는 순간
작은 몸이 흔들리더니,
햄스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수리가 앉아 있었다.
“…어.”
“…어?”
하린의 눈이 커졌다.
“……선배?”
수리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했다.
“마력… 다 썼어요.”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린은 수리를,
수리는 하린을,
건혁은 둘 사이를 번갈아 보았다.
“선배.”
하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이게 뭐예요?”
건혁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솔직하게 하린에게 모든 것을 다 말했다.
처음 언덕에서의 일.
하늘에서 떨어진 여자.
마법.
서림당.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방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 말이 안 되지.”
건혁이 먼저 말했다.
“안 믿어도 돼.”
하린은 고개를 숙인 채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선배.”
잠시 후, 하린이 입을 열었다.
“저요.”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눈에는 놀람보다도 다른 감정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
“선배가 거짓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거, 알아요.”
건혁은 그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하린은 수리를 바라봤다.
아까까지 햄스터였던 존재.
지금은 분명 사람인 여자.
하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가 달라진 이유도 설마...”
그 말에 수리가 고개를 들었다.
“네?”
하린은 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에요. 선배의 그림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니까요. 저는 선배 그림을 보며 힘을 얻었어요.”
하린은 가방을 들며 일어났다.
“이건… 제가 혼자 감당할 얘기는 아닌 것 같네요.”
건혁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하린아”
“걱정 마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문 앞에서 하린은 잠시 멈췄다.
“대신요.”
봉투를 다시 내밀었다.
“한 번만 생각해 주세요."
"나는 생각 없다니까..."
"선배, 저는 선배가 행복하면 좋겠어요.
선배는 저에게... 아니다.
선배 그러니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세요."
문이 닫히고, 현관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수리는 조용히 말했다.
“… 미안해요.”
건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더 복잡해졌네요.”
수리는 창밖을 바라봤다.
햇빛은 여전히 밝았다.
“저기...”
수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여기 있어서… "
"아니야.”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다.
집 안은 숨소리마저 크게 느껴질 만큼 조용했다.
건혁은 테이블에 앉아
하린이 남기고 간 종이봉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끝이 조금 구겨진 봉투였다.
잡았다가 놓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뒤에야,
그는 결국 봉투를 열었다.
미술 공모전 안내서.
심사위원, 상금.
그 어떤 정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붙잡은 건
마지막 줄이었다.
- 당신만의 세계를 그려주세요.-
건혁은 종이를 접어 내려놓았다.
“내 세계는…”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이미 무너졌어.”
서랍을 열자,
오래된 스케치북이 나왔다.
손에 쥐는 순간,
묻어났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