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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꽁지 Oct 14. 2024

오늘 나에게 온 낱말 3

 이번 가을은 깨로 맞았다. 작년 가을은 단풍으로 맞았고 그전 가을은 감으로 맞았는데 올해 가을은 깨가 되어 왔다. 

 깨는 들깨와 참깨가 있다. 참기름을 주는 참깨는 어머니가 취급하지 않는다. 들기름을 주는 들깨는 어머니도 사랑하지만 옆지기(남편)가 더 사랑한다. 자라는 동안 주는 깻잎 덕분이다. 고기와도 궁합이 잘 맞고 간장이랑도 궁합이 잘 맞으니 나 또한 좋아라 한다. 이게 기름이 되면 더 좋다. 두부를 두껍게 썰어 들기름에 부치면 천원짜리건 할매 손으로 만든 것이건 할 것 없이 아주 맛이 끝내준다. 이 들깨가 어떻게 기름이 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매번 어머니가 짜서 큰 생수통에 담아두면 작은 생수통에 덜어와서 먹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니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지 누가 알았겠는가?

 일단 깨는 밭에 누워있다. 낫으로 벤 후 가을 햇볕에 널어두는 것이다. 날씨에 비 예보가 있어 어제 전화가 왔다. 깨를 일요일에 꼭 털어야 하는데 혼자서는 힘들다는 것이다.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옆지기에게 짜장면이나 한 그릇 얻어먹을 요량으로 따라나섰다. 밭에 누워 있는 깨를 볼 때까지만 해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일단 어머니가 베어 서 눕혀 놓은 깨를 옮기는 것부터 내가 할 일이다. 깨는 아무렇게나 옮기면 안 된다. 일단 커다란 멍석을 깔고 그 위에 구멍이 송송난 멍석을 깔아 둔 곳으로 옮긴다. 멍석 가운데는 때릴 것들을 앉아서도 잡을 수 있을 높이까지 쌓고 그 주변으로 쌓아둔다. 멍석 주변에 쌓아두는 것은 멍석으로 들이기 좋도록 줄기가 멍석을 향하게 장작처럼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 한아름씩 들어 옮기다 보면 깨로 만든 담벼락이 10미터 정도 생긴다. 

 옮기는 작업이 끝나면 가운데에 있는 깻단에서 한 움큼을 들어 작대기로 사정없이 때린다. 너무 빨리 때리면 지치고 너무 늦게 때리면 주변에서 보는 사람이 답답해한다. 1,2초에 한 번씩 내려치면 딱 좋다. '하나아둘'의 리듬으로 '하나아'에 팔을 들고 '둘'에 내리치고. 작은 구멍 안에 박혀 있던 까는 매질을 할 때마다 동그랗고 하얗게 떨어져 나온다. 처음에는 신난다. 오호 나온다 나와. 하면서 치게 된다. 한 번 잡은 것은 서른 번에서 마흔 번 정도 치면 이제 더 이상 나오는 것이 없다. 그러면 밖으로 휙 던지고 다시 새로 한 움큼을 잡고 치면 된다. 그러다 점점 힘이 빠지고 이제 내가 뭐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들기름이 싫어질라 한다. 그러다가 이번 들기름은 꼭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한테 주지 않고 혼자 다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늘은 파랗고 햇볕은 좋고 이런 날씨에는 어디를 가도 좋겠구만 나는 깨밭에 앉아서 깨를 털고 있다니 싶어지면 걔를 때리는 일이 끝난다.

 하지만 문제는 깨를 때리는 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깨를 다 때리고 나면 안 펴지는 다리는 펴고 허리를 일으켜 그 자리에서 온몸을 털어야 한다. 바지 주머니 양말 속까지 깨가 들어갔다가 나온다. 머리도 털고 심지어 얼굴도 털어야 한다. 이제 네 귀퉁이에 한 명씩 서서 커다란 멍석 위에 있던 구멍 뚫린 멍석을 들어야 한다. 그 멍석 위에는 마른 깻잎과 깨가 뒤 엉켜 있다. 구멍 아래로 깨가 떨어지고 멍석 위에는 버려야 할 깻잎이 있도록 손으로 휘휘 저었다가 밖으로 버려준다. 어느 정도 버려지고 깻잎만 남았다 싶으면 밖으로 가지고 나온다. 우리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

 아직도 할 일은 더 있다고 한다. 깨 위에 있는 작은 부스러기를 날려야 하고 햇볕에 말린 다음 방앗간에 가져가서 거기서도 뭔가를 더 하는 것 같다. 다음에는 방앗간에 모시고 가는 일을 해야 이 것도 글이 될 수 있으리라. 올가을은 들기름에 부친 두부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맞이했다. 들깨와 한바탕 씨름을 하고 와서인지 어머니가 주신 들기름을 한 손에 잡을 수가 없다. 공손하게 두 손으로 잡고 바닥에 흘릴세라 조심한다. 이 가을도 이렇게 소중하게 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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