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매연속에서도 피어난 생의 단단함을 바라보며
늦가을의 바람은 차갑기보다 쓸쓸했다. 옅은 햇살에 그을린 낙엽이 길모퉁이에 모여 있고, 어디선가 보일러 연기가 뿜어져 나와 허공을 누빈다. 그 연기속에서 이름 모를 나무 한 그루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잎은 다 떨어지고, 줄기는 앙상했다. 아, 저 나무는 이제 끝이구나. 짐작하자니 괜스레 가슴 한켠이 먹먹해졌다.
하필이면 왜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렸을까 연기와 매연이 하루종일 감도는 벽바로 옆, 사람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구석에. 조금만 비켜 있었다면, 바람 좋은 담벼락 아래 있었더라면, 그토록 쉽게 시들지 않았을텐데. 한때 푸르게 빛나던 잎들의 기억도, 고요한 채 묻어가는 듯했다. 나는 그가 다시는 살아나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봄은 기어코 그에게 돌아왔다. 아니, 그가 봄을 불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날 문득, 그 자리에서 연둣빛 잎이 트기 시작했다. 어느새 가지마다 파란 잎이 촘촘히 달렸고, 끝끝마다 살구 열매가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놀라움보다 경외감에 가까웠다. 무관심 속에 잊혀졌던 그 나무가, 마치 삶의 선언이라도 하듯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창밖으로 뻗은 가지는 한없이 용감했다. 마치 창문을 뚫고들어올 기세로 길게 뻗었다. 햇볕을 향해, 바람을 향해 생을 향해 뻗어나가는 그 가지들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몇 개를 밀어내고 자르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제 모습을 지켜냈다. 꺾인 자리에서도 새순이 자라났고, 상처난 줄기에서는 더 단단한 껍질이 돋아났다.
새 소리에 눈을 뜬 아침, 나는 그가 새들에게 제 몸을 내어주는 모습을 보았다. 가지 위에서 지저귀는 작은 새들, 그 아래에서 흔들리는 나뭇잎들. 그는 살랑살랑 가지를 흔들며 마치 “괜찮다”고 “어서 쉬어 가라“고 말하는듯 했다.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그 잎과 가지 하나 하나가 말을 걸어오는듯 했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다시 살아났다. 그것도 지독할 만큼 단단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이제 다시 시간이 흘러, 또 다른 겨울이 올것이다. 또다시 매연이 그의 숨통을 조여오고, 차가운 바람이 가지를 얼게 만들테지만, 나는 안다 그는 다시 이겨낼 것이다. 이미 그는 나에게 그늘이 되어 주었고, 기쁨이 되어 주었으며, 생명의 고요한 교훈이 되어 주었다. 살구 나무는 말이 없다.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통해 많은 말을 듣는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한 호흡 그 이상이라는 것. 사라질 뻔한 존재가 다시 피어날때, 우리는 비로소 생명의 의미를 되묻는다는것.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다. 보이지 않는 고통, 묵묵한 인내, 그리고 그 뒤에 오는 조용한 승리. 그 이야기는 대개 말없이 존재 하지만, 한번 마음을 기울이면 그 울림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오늘도 나는 창밖의 살구나무를 바라 본다. 여전히 담담하고, 여전히 강인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들이 내게 조용히 말한다.
“나는 괜찮아. 너도 괜찮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