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임배추

by 자그노기

해마다 11월이 다가오면 거리 곳곳에서 ‘절임배추 주문 받습니다’ 라는 현수막이 걸린다. 눈으로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마치 김치 냄새가 코끝에 스며드는 듯하다.


김장을 하려면 무엇보다 고춧가루를 먼저 준비해야 한다. 나는 매년 시골에 사는 큰언니에게 부탁하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주문하지 않았다. 작년에 남은 고춧가루가 아직 넉넉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김장날이 집안의 큰 행사였다. 한겨울을 나기 위한 생존의 의식이자, 이웃과 정을 나누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제는 김치냉장고 덕분에 계절과 상관없이 김치를 담글 수도, 사 먹을 수도 있다. 김장은 점점 추억의 뒤편으로 물러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손수 김치를 담그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김치 담그는 게 제일 쉬워”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속엔 정성과 자부심이 담겨 있다. 자신이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맛있게 먹는 사람의 한마디 “맛있다”를 듣기 위해서다. 김장을 ‘노동’이 아니라 ‘나눔’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도 매년 김장이 끝나면 어김없이 몸살에 시달렸다. 커다란 통 안에서 갖가지 채소를 버무리다 보면 허리가 쑤시고 손끝은 얼었다. 마치 거인의 비빔밥을 비비는 듯한 고된 일이다. 하지만 양념이 고루 섞여 갈색빛으로 변해갈 때면, 침샘이 먼저 반응한다. 그 순간만큼은 고단함도 잊는다.


아직 냉장고 한켠에는 묵은지 한 통이 남아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새김치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올해는 11월 며칠쯤이 김치가 가장 맛있게 익을 날일까. 그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여전히 김장철의 향기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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