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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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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아래
Nov 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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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서 미술 학원을 끊었다.
크레파스처럼 생긴 오일파스텔로 내가 좋아하는 하늘을 그려보기로 하고.
하지만 세 번째 수업을 마치면서 선생님은 내게 '하늘' 전에 '기본'을 먼저 배워야겠다고 하셨고, 그 후로 나는 각종 과일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화가의 필터를 거쳐서 흰 도화지 위에 그려진 한라봉은 당황스럽게도 주황색이 아니다.
나는 수십 번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열심히 모작을 한다.
흰 스케치북 옆에 120색 오일파스텔을 펼쳐두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무슨 색을 쓸까'하는 단순한 물음만이 가득했고, 그 점이 좋았다.
그것은 내게 '멸치 똥 따기'에 대한 오래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어릴 때 우리는 멸치 다시를 좋아하는 엄마의 취향에 맞추어 정기적으로 마른 멸치를 박스째 다듬는 일을 해야 했는데, 동생들은 그 일을 아주 힘들어했다.
하지만 나는 그 단순한 반복이 좋았고, 덤으로 다른 이들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멸치 똥 따는 일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다른 이들에게는 고역일 때, 그 일에 대한 가치는 무한으로 올라가는 것 같다.
또한 그 일이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까지 뒷받침되면, 나는 마치 그 일을 통해 자아실현에 이르는 기분을 느낀다.
멸치 똥 따기는 내게 최초로 그런 내적 희열을 느끼게 해 준 일이었다.
스무
장 짜리 작은 스케치북을 다 써가는 지금 알게 된 것은, 예술의 과정은 생각보다 예술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내게 '예술적'이라 함은, 온갖 멋지고 복잡한 철학적 아이디어들이 넘쳐나며 절절한 감정이 폭발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 예술을 해보니, 그것은 명상과 비슷한 일이었다.
머릿속과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들을 비워내고 고요하고 단순해지는 일.
어느덧 일상의 틈에서 스케치북을 꺼내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일이 들뜬 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완성된 그림은 초등학생의 그것과 같더라도,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충분히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유용하고 좋은 삶의 도구를 하나 얻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슬플 땐 빵을 사는 대신 그림을 그리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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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부터 우울의 물때가 끼어 흐릿한 경계를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관찰하고 이해함으로써 스스로를 또렷하게 그려가고자 애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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