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은 불안이 나의 전부였다.
생각의 시작도, 결론도 항상 불안에서 끝났다.
그 감정에서 벗어날 틈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가끔, 불안이 올라와도 완전히 잠기지 않는 순간이 생긴다.
여전히 불안하지만 그 안에서 조금 숨을 쉴 수 있는 느낌.
그게 바로 여백이었다.
여백은 불안을 밀어내서 생기지 않는다.
애써 긍정하려 하지 않고, 지금의 상태를 그대로 두었을 때 조용히 생긴다.
불안과 나 사이에 한 걸음 정도의 거리.
그 거리 덕분에 선택지가 늘어난다.
불안해도 잠깐 쉬어갈 수 있고, 불안해도 오늘 할 일을 하나 정할 수 있다.
감정이 행동을 완전히 결정하지 않는다.
여백이 생긴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다만 불안이 나를 완전히 점령하지는 않는다.
그 차이는 작지만 분명하다.
아직 여백은 좁고 자주 사라진다.
그래도 나는 이 감각을 기억해 두려 한다.
불안 속에서도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작은 증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