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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채 Nov 25. 2022

삼겹살, 이젠 안녕

100일 글쓰기(59일 차)

친하게 지내는 인터넷 밴드 동호회에서 '번개모임'이 게시판에 올라왔다. "일시:11/14(목), 장소: 사당역 오후 7시" 저녁시간에 별다른 일정이 없고 장소도 동네 근처다 보니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참석 버튼을 누를까 하다가 잠시 멈칫했다. '아니, 식당이 표시가 안돼 있잖아, 혹시 삼겹살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왜냐하면 나는 1년 전부터 채식으로 식단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가능하면 저녁 회식자리를 의식적으로 피했다. 대한민국에서 저녁 회식자리의 대부분은 '삼겹살에 소주'로 시작해서 '치킨에 맥주'로 끝나기 때문이다. 처음 채식을 시작하고 나서 본의 아니게 고깃집 회식에 참석했다가 나도 모르게 안절부절못하고 상추쌈에 김치만 싸 먹던 기억이 몇 차례 있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상추쌈에 김치만 싸 먹던 기억이 몇 차례 있었다.   


그 이후로는 내가 저녁 메뉴를 결정할 수 있는 자리면 고깃집을 피했다. 횟집에 가던지 쌈밥집을 주로 이용한다. 1년이 지나도록 그렇게 좋아하던 삼겹살을 나의 '주적'으로 삼고 피해 다녔고 용케도 나 자신을 잘 지켜냈다. 심지어 내가 제일 좋아하던 잠원동의 '고사리 삼겹살' 마저도 나의 맛집 리스트에서 영원히 지워버렸다. 그랬던 나에게 결국 시련이 찾아왔다. 저녁 식사 번개모임 참석자들 '임시 챗방' 이 열리고 장소가 공개되었다. 식당의 이름은 '1357 철판 삼... 겹... 살...',  뜨악! 일 년 동안 피해 다녔는데 결국 이렇게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내가 모임 참가 취소를 하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비겁해 보였다. 물론 회원들 중에는 이미 내가 '비건'인 것을 알고 걱정해 주는 회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저녁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장소에 도착했다. 굳은 마음을 먹고 지하에 있는 식당 계단을 내려가는데, 벌써부터 삼겹살 굽는 냄새가 스멀스멀  후각을 자극하고 온 몸의 세포를 흔들어 깨운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미리 온 회원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빠르게 메뉴를 스캔했다. '치즈 불주꾸미', '계란찜'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쌈에 김치만 싸 먹는 것은 면할 수 있을 거 같아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생일자까지 오고 나서 메인 메뉴인  '5mm짜리 옛날 삼겹살 7인분'과 '치즈 불주꾸미'를 사이드 메뉴로 주문했다. 지글지글 윤기 자르르 흐르는 김치와 함께 익는 삼겹살이 여전히 나를 유혹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젓가락이 가지는 않았다. 판이 여러 번 바뀌고 고기의 종류도 '3mm짜리 한방 육수 대패삼겹살'로 바뀌었다.


회원들이 "조금만 먹어봐라", "오늘만 먹으라"는 압박과 권유에도 꿋꿋하게 사이드 메뉴만 공략했다. 결국 잘 버텼고, 이젠 내 체질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정산해 보니, 나빼고 거의 3인분씩은 먹은 거 같다. 그렇게 육식을 좋아하던 내가 삼겹살 식당에서 결국 한점도 안 먹었다. 식당 문을 나서는데 속으로 뿌듯했다. 마치 전쟁터에서 피 터지는 전쟁을 치르고 무사히 살아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식사 후에 다행히 호프집을 패스하고  카페에서 우아하게 '카푸치노'로 마무리를 했다. 아무래도 식당에서 불쌍해 보였던 나를 배려한 회원들의 따듯한 동정심 때문인지, 아니면 전에 호프집에서 맥주 안주로 내리 '치킨무'만 먹던 내 모습이 꼴 보기 싫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던 1차, 2차 모두 성공한 하루였다.

그렇게 육식을 좋아하던 내가
삼겹살 식당에서 결국 한점도 안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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