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니아코리아(2000)
거친 고객 불만의 목소리와 함께 직원의 목소리는 점차 커졌다. 멱살잡이 직전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때 여직원이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건 그냥 얘기하는 거예요. 원래 부산 사람들 목소리가 좀 커요"라고 말이다. 서울 말씨는 나긋나긋 한데 비해서 부산 사투리는 약간 거친 느낌이 든다. 부산 고객들과 직원들 간에 다소 높은 톤의 대화는 마치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것으로 들려서 많이 놀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 거친 말투 속에 부산 사람들의 따뜻한 '정'은 서울 사람들보다 진하고 깊이가 있었다. 부산 근무시절이 벌써 20여 년이 지났지만 그때 근무했던 부산 동료들과는 아직도 연락하고 지낸다.
부산에서 근무하기 전, 아프리카 가나에서의 생활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당초 해외근무의 또 다른 목적은 개인사업의 기회도 잡아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당시 달러 환율의 급등으로 인하여 더 이상 개인사업은 의미가 없었다. 1년 정도 지사장 업무를 마치고 고용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국내로 귀국했다. 국내에는 딱히 정해진 회사가 없었지만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근무했었다는 남모를 자긍심이 생겨서 무작정 귀국한 것이다. 애가 둘 딸린 삼십 대 중반의 백수는 6개월 동안 나름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 시절에 다시 직장 생활하면 모든 경제권을 아내에게 주기로 약속했고 그 약속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 요즘은 가끔 그 약속이 후회스럽기도 하다
구직활동 중에 신문에 트럭회사의 구인광고를 보게 되었다. 당시 '스카니아'라는 브랜드는 나에게는 생소했다. 본사는 서울 논현동의 건설회관 건물에 위치해 있었지만 나의 근무지는 부산이었다. 나는 서울 토박이이다.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은 곳이 줄 곳 서울이었다. 한 번도 지방에서 살아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삼십 대 중반에 부산이라는 낯선 도시는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며칠 고민하다가 결국 지원했고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살고 있던 노원구의 아파트를 과감하게 처분하고 서초구에 아파트를 매입해서 전세를 주고, 남은 돈으로 부산 구서동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부산으로 이사를 한 이후에 주말마다 어린 자녀들과 함께 야외로 놀러 나갔다. 햐얀 백사장에 갈매기가 끼륵끼륵 하는 바닷가에서 물놀이도 하고 맛집 투어도 하며 신나게 부산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서울에 있었으면 동해나 부산 바다를 보려면 최소 3시간을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차로 20분이면 그 유명한 광안리나 해운대 바다에 도착한다. 지척에 해수욕장이 있다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다. 보통 부산 사람들은 광안리나 해운대는 외지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하고 다른 해수욕장을 간다. 나도 당시에는 부산 사람이라서 주로 송정해수욕장이나 일광해수욕장을 자주 갔다.
일광해수욕장이 있는 기장군은 '미역' 과 '짚불 곰장어'가 유명하다. 기장미역을 넣고 끓이는 가자미 미역국은 심해의 신선한 해초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식당 옆에는 커다란 수족관에서 곰장어들이 미끄러지듯이 헤엄쳐 다닌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따라 포장마차에서 곰장어를 처음 먹어본 이후로 곰장어는 그다지 익숙한 음식은 아니다. 방금 잡아서 짚불에서 직접 굽는 곰장어는 새까맣게 그을린 채로 상위에 오른다. 식당 직원은 집게로 능숙하게 그을린 부분을 잘 익은 속살의 곰장어에서 분리해서 먹기 좋게 잘라낸다. 포장마차에서 파는 냉동된 곰장어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다.
2000년 초에 오픈한 스카니아 양산 센터는 스웨덴 스카니아 본사에서 직접 투자한 트럭 정비 공장이다. 센터장님을 포함해서 대부분 직원들은 국내 '아시아 자동차' 출신자들이었고 스웨덴 본사에서 정비 공장 운영을 컨설팅해 주러 파견 온 영국 국적의 기술자도 있었다. 나도 이곳에 오픈 멤버로 참여해서 약 5년간 근무를 했다. 근무하는 동안 여러 트럭회사들의 벤치 마킹 대상이 되었다. 그중에 한 번은 경쟁사인 독일 트럭회사 독일인 임원들이 방문한 적이 있었고 다소 냉소적이고 소극적으로 응대했던 기억이 있다. 그 독일 회사가 현재 내가 근무하고 있는 'MAN'이라는 독일 트럭 회사였던 것이다. 인연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 이어질지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