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사랑은 있지만 표현을 잘 못한다. 1970년대의 아버지들도 그랬다. 산업화 시대에 국가의 발전을 위해 가정을 돌 볼 시간 없이 바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시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특히 아들에게는 무뚝뚝한 것이 아버지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중에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추억이 남아있다.
평생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을 하신 아버지는 별다른 취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옷 사는 것을 좋아하였고 유난히 옷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건 아마도 어린시절 어렵게 살던 시절에 대한 보상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버지의 DNA를 갖고 태어난 나는 아버지와 많이 달랐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옷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 어린시절에는 주로 어머니가 내 옷을 사주셨고 결혼후에는 아내가 대신 산다. 아내는 워낙 내가 옷사는데 관심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나 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백화점이나 홈쇼핑등에서 산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즈음에 나에게 옷을 한벌 사주시려고 했다. 몇 차례 같이 옷 사러 가자고 했으나 나는 싫다고 거절했다. 결국은 투덜투덜 대며 집 근처 남대문 시장에 따라갔다. 나름 잘 나가는 옷가게를 방문해서 아들을 달래며 옷을 샀다. 하지만 짜증내는 아들을 데리고 귀가하는 길 육교위에서 결국은 아버지는 폭발하셨다. 갑자기 아들에게 귀싸데기를 올리셨다. 나는 쎄게 얻어맞고 울면서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아픈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게 아버지에게 맞았던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었던거 같다.
내 나이가 그 당시 아버지의 나이를 휠씬 지난 지금 , 생각해보면 아버지 마음이 어떠했을까 이해가 된다. 그 후에 대학에 들어갈 때 아버지는 나에게 동대문시장에서 맞춤 양복을 선물해 주셨다. 물론 그때는 좀 더 성장한 나였기에 어린시절처럼 투정은 부리지 않았고 감사하다는 표현도 했었던 것 같다. 외아들에게 예쁘고 멋진 옷을 사주기를 원했던 기억속의 아버지는 거인같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멋진 옷 한벌 사드리지 못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이어진다.
평소 당뇨가 있으셨지만 팔순의 나이에도 건강하셨던 분이셨다. 지하철 택배 아르바이트로 건강도 챙기시고 용돈도 버시면서 활동하던 중이셨다. 몇 달 전에 갑자기 몸의 여러곳이 아프셨다. 병원에 입원을 해서 치료 받고 퇴원하고, 몇 번의 입퇴원을 반복했다. 결국 올초에 돌아가셨다. 부친이 사망을 신고하고, 유품을 정리하고, 금융거래등도 모두 정리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친의 빈자리가 조금씩 허전해 짐을 느낀다. 오늘 같이 바람이 부는 날이면, 어린시절 육교 위에서 마주했던 건강하셨던 젊은 날의 아버지가 더욱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