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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채 Mar 23. 2023

담임선생님의 구절판

밀쌈(구절판)

초등학교 5학년때 담임선생님 주특기 요리는 '구절판'이었다.  8 각형의 찬합에 밀전병을 포함해서 9가지의 요리를 넣은 음식이 구절판이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구절판을 처음 대한 것은 선생님이 나의 외숙모가 되고 나서부터이다. 그래서 중학생 이후로는 명절 때 외가댁에 가면 은사이자 외숙모가 만들어주신 구절판을 한동안 맛볼 수 있었다.   


구절판의 기원은 밀쌈이다. '조선요리법', '이조궁정요리동고' 등에 언급되어 한때는  고급스러운 궁중요리로 서민층까지 널리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실제로 먹는 일이 드물어졌다. 재료를 손질하고 밀전병을 붙이는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바쁜 현대인들이 가정에서 직접 만들어 먹지 않는다. 고급 한정식집에 가서야 겨우 맛볼수 있다.



한식조리기능사에서는 구절판 대신에 '칠전판'이 있다. 밀전병과 더불어 계란지단(흰색, 노란색), 오이(파란색), 당근(빨간색), 표고버섯(검은색), 소고기로 구성되어 있다.  엇핏보기에도 음식의 색감이 화려하다. 5가지 음식색깔은 오행사상을 상징하는 '오방색'이다. 파랑은 동쪽, 빨강은 남쪽, 노랑은 중앙, 하양은 서쪽, 검정은 북쪽을 뜻한다.


옛날 중국의 황제가 노란 기와집과 노란 옷을 입고 사는 이유는 이러한 오방색을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오방색은 전주비빔밥이나 신선로 등의 음식에서도 사용된다. 오행은 목(나무, 청색), 화(불, 적색), 토(흙, 황색), 수(물, 흑색), 금(쇠, 백색)을 상징한다. 음식하나에 이런 철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니 약간 머리가 복잡하기도 하지만 여하튼 만들어 놓고 보면 화려하기도 하고 고급스럽기도 하다.


요리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자에게 계란지단과 전병은 쉽지 않다. 요리 선생님의 시범이 있었지만 단순한 절차에 비해서 숙련이 되지 않아서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된 건 태어나서 처음 붙여본 밀전병 치고는 결과물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지단과 밀전병 만드는데 워낙 조심조심 '약불'과 '불끄기'를 반복하다보니 조리시간이 지체 됐다.


밀전병은 8cm, 나머지 재료들은 5cm x 0.2cm x 0.2 cm가 요구사항으로 제시되었다.  오이는 길이를 맞춰 자르고 돌려 깎기를 해서 채를 썰어 소금에 살짝 절였다.  당근은 채를 썰고 나서야 길이를 맞추지 않은게 생각나서 부랴부랴 이미 썰어진 채를 모아 자르다 보니 삐뚤빼둘 하다. 소고기(홍두깨살)와 표고버섯도 채 썰고 불고기양념(간설파마 후깨참)을 하고 지지고 볶아서 요리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마무리했다.


"땡~, 시간초과로 탈락입니다." 칠전판에 주어진 실기시험의 제한시간은 40분이다. 이십여분이나 시간이 초과되었다. 아무래도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갑자기 이번 주말 일요일 아침에 부엌에서 밀전병을 부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주말 브런치 메뉴는 '밀쌈'이 될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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