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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채 Apr 06. 2023

붉은 홍합, 흰 홍합

홍합초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소주'라고 하는 것을 처음 마셨다. 그 당시 2학년 선배들은 신입생들을 환영한다는 명분으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시키고 냉면그릇으로 소주 한 병씩을 원샷하게 했다. 한마디로 '공포의 음주문화'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사회에 불만이 있어서 그랬었는지, 가정에 불만이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애인한테 바람맞고 분풀이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의 전공은 '기계공학'이다. 공대생들은 우리 과를 '개과'라고 부른다. 체육대회도 X처럼 악착같이 하고, 술도 X처럼 많이 마셨다. 과대표를 맡고 있던 나는 객기를 부려 두 그릇을 연거푸 들이부었다. 안주로 짬뽕 국물에 떠다니는 홍합을 몇 개 건져 먹고는 바로 화장실로 직행후 인사불성이 되었다.  홍합은 피 끓는 청춘에게 '안주'라는 이름으로 수줍게 인사를 건넸지만  오늘은 우아한 조선시대 '궁중요리'로  다가왔다.


홍합은 피 끓는 청춘에게 '안주'라는 이름으로 수줍게 인사를 건넸지만  
오늘은 우아한 조선시대 '궁중요리'로  다가왔다.



'초(炒)'라고 하는 것은 중국요리에서는 '알맞은 크기와 모양으로 만든 재료를 기름에 조금 넣고 센 불이나 중간 불에서 짧은 시간에 뒤섞으며 익히는 조리법'을 말한다. 우리나라 조리법에는 '조림처럼 조리다가 국물이 조금 남았을 때 녹말을 풀어 넣어 국물을 엉기게 하여 윤기 나게 조리는 것'으로 요리 뒤에 '~초'를 붙인다. 대표적으로 '홍합', '전복', '삼합' 등의 궁중요리가 있다.


출근길에 실습실을 지나다가 멀리 커다란 양동이에 하나 가득 담겨있는 홍합이 보인다. 그런데 껍데기가 없이 알맹이만 있다. 가끔 방문하는 홍합 짬뽕집에는 홍합이 짬뽕그릇에 산처럼 쌓인 채로 테이블로 나온다. 짬뽕을 먹는동안 정신없이 껍데기를 옆에 있는 스테인리스 빈통에 버리면 또다시 통에 하나 가득 홍합껍데기가 쌓인다. 항상 그런 껍데기 있는 홍합을 보다가 알몸 홍합을 보니 약간 벌거벗은 숙쓰러움이 다가온다.




생홍합을 손으로 주물러 보기는 처음이다. 그것도 안을 뒤집어 깊숙이 박혀있는 단단한 실타래처럼 생긴 불순물(족사)을 찾아내느라고 이리저리 훑어보고 가위로 잘라내고 깨끗하게 다듬어 깔끔한 홍합으로 재 탄생 시킨다. 말끔해진 홍합에 소금을 뿌리고 채에 걸러 흔들어서 목욕을 시키고 끓는 물에 충분히 데치고 찬물에 헹군다. 충분히 데치지 않으면 조리 후에 그릇에 담으면 지저분한 작은 알갱이 자국들이 그릇에 묻어날 수 있다.


그런데 알맹이 색깔을 보니 빨간색과 흰색이 섞여있다. 빨간색은 암놈, 흰색은 수놈이란다. 갑자기 중학교 때 배운 생물지식이 소환된다. 조개 종류에 따라 '자웅동체(암수한몸)' 이기도 하고 '자웅이체(암수딴몸)'이기도 하다. 또 어떤 종은 시간에 지남에 따라 암놈과 수놈의 성이 바뀐다고도 했던 기억이 있다. 자연계의 생명체는 언제 봐도 신비하고 다채롭다. 


다른 요리에서는 보통 다지기 양념으로 사용하던 대파는 통으로 썰고 마늘과 생강은 편으로 썰어 존재감을 드러낸다. 냄비에 조림장으로 간장 1큰술, 설탕 1큰술, 물 3큰술 과 함께 마늘 편, 생강편 을 먼저 넣고 끓이다가 중불로 바꾸고 데친 홍합과 대파를 넣어준다. 홍합을 나중에 넣는 이유는 해산물은 너무 오래 삶으면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국물이 거의 졸여지면 후추와 참기름을 넣고 섞는다.


졸이는 중에 거품이 많이 일어나면 국물이 안 보여 갑자기 탈 수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이때는 냄비를 불에서 분리시켜 국물을 확인해야 한다.  한 큰 술 정도 국물이 남으면 그릇에 담아내고 남은 국물을 그릇에 붓고 미리 고깔을 떼어내고 부셔둔 잣가루를 고명으로 뿌려준다. 그릇에 담아놓은 비주얼이 그럴듯하다. 왠지 소주 한잔을 부르는 각이다. 냉면 한 사발 말고 소주잔으로 한잔 정도만.

냉면 한 사발 말고 소주잔으로 한잔 정도만.

[좌] 품평회(홍합초, 섭산적)  [우] 레시피 (한국조리,2018, 엄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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