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뷰 공간

집안으로 들어오세요

한여름밤의 추억

by 소채

딸아이가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을 얻어 살림장만을 하느라고 요 며칠 나까지 덩달아 바쁜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은 새물건을 사기도 했지만 몇 가지 물건은 중고 온라인 어플인 '당근'을 통해 구매하고자 했다. 어플을 통해 티브이, 전자레인지 구매 예약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미션 받은 품목은 '화장대용 거울'이었다.


오피스텔이 원룸이라서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별도의 화장대를 두지 못하고 책상 위에 화장대용 거울을 구입해야 했다. 티브와 전자레인지는 이미 판매자와 이미 연락이 되어 있던 터라 오늘 안에 거울도 함께 구매하기 위해서 바로 '당근'에 나온 물건들을 서칭 했다.


다행히 어플에서 반원 형태의 화장대 거울이 단돈 '만원'에 게시되어 있어서 얼른 채팅창에 문자를 보내서 구매가 가능한지를 물어보았고 가능하다는 답장과 함께 문자가 도착했다. "주소를 보내드릴 테니 저녁 8시 전까지 오세요."


"주소를 보내드릴 테니 저녁 8시 전까지 오세요."




보내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서 검색을 하니 집에서 15분 거리였다. 주소에 나와있는 골목에 들어섰을 때, 좁은 골목 양쪽으로 빌라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다. 강남 한복판에 이렇게 많은 빌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한때 강남의 유흥가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성들이 근무지 근처에서 살기를 원해서 강남의 오피스텔이나 빌라들이 인기가 좋다는 얘기는 들어봐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20년을 서초구에서 살았지만 근처에 이런 빌라들이 있다는 것은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알려준 주소 정문에 도착해서 도착 알림 문자를 보냈더니 인터폰으로 호출을 하라는 것이다. 도착한 건물 앞은 차량 차단막이 있고 세대 호출을 할 수 있는 시설은 없었다. 약간은 당황스러워서 빌라이름을 확인해 보니 보내준 주소와 빌라이름이 달랐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빌라이름을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더니 도착한 건물에서 백 미터 후방에 있는 다른 빌라를 가리켰다. 뭔가 거래가 약간 꼬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빌라이름을 믿고 차량을 이동시켰다.


다시 차를 돌려 알려준 빌라 앞에 차를 주차하는 동안 주위는 어둑어둑해져서 가까스로 빌라이름을 확인하고 다시 채팅창에 "건물 앞에 도착했습니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당연히 화장대 거울을 가지고 내려와서 주차장에서 물건확인하고 인계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판매자는 당황스럽게도 "301호를 호출하고 위로 올라오세요"라는 문자를 내게 보내왔다. '아니, 이건 또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근에서 거래를 여러 차례 해봤지만, 집으로 올라와서 물건을 확인하고 가져가라는 경우는 처음이다.


"301호를 호출하고 위로 올라오세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문자를 보냈다. " 제가 올라가야 하나요"라고 했더니 "무게가 좀 있어서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갑자기 오래전에 봤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떡볶이집주인아주머니의 명대사와 그녀가 입고 있던 헐렁한 민소매 티셔츠가 연상되었다.




배우 권상우를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영화는 <말죽거리 잔혹사, 2004년>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현수(권상우 배우)는 운동을 끝내고 늦은 저녁즈음에 단골 떡복기집에 들른다.


그날도 주인 아주머니(김부선 배우)는 앞이 축 쳐저 가슴이 보일랑 말랑 하는 늘어진 민소매 셔츠를 입고 떡복기를 하나가득 그릇에 담아 현수에게 준다. 이때 주인아주머니는 현수에게 다소곳이 다가가 속삭인다. "현수야, 아줌마 믿지". 그날밤 현수는 평생에 잊지 못할 밤을 보낸다.


"현수야, 아줌마 믿지".



왠지 3층에 올라가면 빨간 립스틱을 짓게 바르고 야한 망사 잠옷을 입은 판매자가 나올 거 같아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화장대 거울을 기다리고 있을 딸내미가 생각이 나서 용기를 내서 인터폰에 '301'을 누르고 호출 버튼을 눌렀다. 인터폰 너머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당근에 물건 내놓은 적 없습니다."


누군가 심심해서 장난 삼아서 허위 판매물건을 올렸거나 아니면 8월 한여름밤에 귀신의 장난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쭈뼛섰다. 얼른 '당근' 어플의 채팅창을 닫고 그 좁은 골목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건물 앞 주차장에서 엉뚱한 상상을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 차 창문을 열고 뜨거워진 얼굴을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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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터넷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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