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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채 Nov 21. 2023

초장에서 과일향이

오징어 브로콜리 숙회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시뻘건 소스를 고무장갑 낀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서 입속에 넣어본다. 분명 맵고 시큼한 맛이 '초장'의 맛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빈 통들을 보니 고추장도 있고 식초도 있는 걸로 봐서는 분명 초장인 듯한데 그 맛이 예사롭지 않다.

초장인 듯한데 그 맛이 예사롭지 않다.

보통의 초장은 끝 맛이 찌릿한 절벽이라면 오늘의 맛은 몽고의 광활한 초원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르름이 이어지는 맛이다. 얼른 벽에 붙어 있는 '오징어 브로콜리 숙회' 레시피를 보니 '사과'와 '배'가 있다. 역시 과일이 분쇄기에 갈려서 소스와 하나가 된 것이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무를 분쇄하고, 쪽파를 송송 썰고 설탕, 매실농축액, 고춧가루, 참깨까지 골고루 섞였다. 가짓수로 따지자면 총 10가지 정도의 식재료가 조화와 융합을 통해 전혀 신세계의 '초장 소스'를 만들어낸 것이다. 일반 가정식이나 식당에서는 좀처럼 따라 하기 힘든 열정의 과정이다.




'숙회'는 육류 내장이나 생선, 야채 따위를 살짝 익혀서 먹는 음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숙회라는 용어는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지는 않지만 가끔은 술자리에서 '문어숙회'를 통해 만날 기회를 갖는다. 문어숙회는 문어를 뜨거운 물에 데쳐서 초장이나 참기름장에 찍어먹는 요리이다.

'숙회'는 육류 내장이나 생선, 야채 따위를
살짝 익혀서 먹는 음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메뉴는 문어 대신 오징어를 사용해서 숙회를 만들되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돼서 브로콜리를 넣는다. '오징어 숙회'는 딱히 숙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가정에서 오징어를 데쳐서 반찬으로 나오면 의례히 초장을 찍어 먹곤 했다. 물론 가정에서 반찬으로 브로콜리를 데치면 초장을 찍어 먹는다.


그러던 두 가지 반찬이 오늘은 컬래버레이션을 했다. 데친 오징어와 데친 브로콜리가 과일향 듬뿍 인 초장소스와 버무려져서 새로운 '오징어 브로콜리 숙회'로 거듭났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낯선 경험이지만 왠지 익숙한 식감이라서 그런지  시나브로 다가왔다.




배와 무는 가볍게 세척 후에 껍질을 필러로 벗겨내고 사과는 깨끗이 씻겨 옮겨진다. '왜 사과껍질은 벗기지 않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배, 무, 사과 모두 분쇄기를 통해 갈아서 반찬요리에 기본재료로 사용되기 때문이었다. 통째로 받은 무는 도대체 얼마만 한 크기로 분쇄기에 넣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분쇄기에 들어가는 최대크기로 썰어야 할지 아니면 최소크기로 썰어 넣어야 할지 고민하던 상황에서 지나가던 선배가 툭하니 내뱉는다. "최소한 사이즈로 썰 수록 잘 갈릴 거예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너무 잘게 썰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커다란 깍두기 모양으로 썰어서 분쇄기에 넣고 전원스위치를 돌리니 '윙~' 하고 순식간에 무즙이 돼버린다.


배와 사과는 씨를 제거하고 같은 요령으로 즙으로 만들어 섞어서 아무 생각 없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나중에서야 내가 갈아준 과일즙이 '초장 소스'에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내가 '급식실 초짜'가 맞는 듯하다. 어디에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선배들이 가져다준 것들을 열심히 갈았으니 말이다.


[사진] 보리밥, 시금치 된장국, 소고기 숙주볶음, 오징어 브로콜리 숙회, 귤, 배추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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