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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채 May 17. 2022

질풍노도의 시기, 친구들

고등학교 친구(별장계)

매년 오월 즈음에 대학 캠퍼스에는 축제가 열린다. 1987년 5월, 대학 입학 후 나고 두 번째 맞는 대학 축제에 나이 지긋한 여사님들이 젏은 남학생들과 함께 있다. 캠퍼스 내의 여기저기서는 여러 가지 행사들로 왁자지껄했다. 일감호 근처 잔디밭에서는 군데군데 임시 주막이 만들어 지고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들이 진동을 한다. 우리는 자리잡고 앉아서 파전과 막걸리를 시켜 시끌벅적한 소음을 반주삼아 한잔씩들 쭈욱 들이킨다. 친하게 지내던 고등학교 친구, 5명이 모두 대학에 입학하고 어머니들을 대학 축제에 모시고 캠퍼스 구경도 시켜드리고 젋음의 축제도 함께 했다. 그때 어머니들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 즈음이었다.


질풍노도의 시기인 고등학교 1학년 때 '독수리 오 형제' 친구들을 만났다. 들뜬 마음으로 일학년을 공부보다는 놀러 다니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는지 지금은 이해가 안가지만 머리를 파마하고 롤라장에도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나마 2학년 때부터는 대학이라는 목표를 두고 학교 근처 '대룡 독서실'에서 공부에 몰입했다. 가끔 독서실에서 마주쳤던 친구들과의 만남도 자제하다 보니 관계가 서먹해지기까지 했다. 결국 대학은 나 혼자 입학했고 나머지 4명은 모두 재수해서 한 해 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다행히 어색했던 관계는 친구들의 재수시절 '정일학원'근처에서 친구의 생일파티 겸 학력고사 합격기원 자리에서 풀었다.


대학시절 친구들의 아지트는 지금은 '남산 돈가스'로 유명한 가게들이 있는 밀집해 있는 남산 아래 광일이네 집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든지 주기적으로 만나서 음주에 카드놀이로 청춘의 밤을 보냈다. 얼마나 두들겨 댔으면 나중에 그 집이 비바람 몰아치는 어느 여름 장마에 축대가 무너져 다시 공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물론 원인이 우리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다소 양심의 가책은 들었다. 놀러 갈 때마다 할머니는 우리들을 귀여워해주시고 자주 농담도 해주였다. 가끔 까치 담배도 얻어 피웠다. 나중에 우린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할머니 장례식에서 항상 미소로 우리를 맞이해 주시던 할머니를 위해 추모했었다.


병찬이네 집은 황학동 재래시장 근처 약국집이었다. 갈 때마다 아버님은 하얀 약사 가운을 입으시고 온화하신 모습으로 바카스를 손수 따서 주셨다. 그리고 삼 형제를 키우셨던 어머님은 약간 시크하셨지만 우리가 놀러 가면 아버님의 양주를 꺼내서 주시곤 하셨다. 소주 마실 돈도 부족했던 대학생들에게 양주는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제대로 된 양주 한 병 사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 나중에 병찬이 결혼하는 날 사회는 내가 진행했다. 잠실 종합운동장 야외 결혼식장에서 치러진 잊지 못할 이벤트였다. 결혼식이 끝나갈 무렵에 비까지 내렸다.


나는 어려서부터 학창 시절 내내 주위에 여자들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홍석이는 어린 시절부터 누나들에 둘러싸여 귀여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지금은 자녀 둘 모두 딸이다. 항상 주위에 여자들로 둘러싸여 살아온 그 친구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대학시절 홍석이가 다니던 학교 축제에서 내가 불렀던 유머러스한 노래들이 소환되었다. 그 친구에게는 남의 학교에 놀러 가서 거리낌 없이 어울렸던 내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거였다. 나도 한때는 남들 앞에서 잘 노는 청년이었음을 기억하게 해주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때 남자들의 놀이 중 하나는 '지우개 따먹기'였다. 책상 위에 두 개의 지우개를 놓고 한 명씩 손가락으로 튕겨서 상대방의 지우개를 떨어뜨리면 이기는 것이다. 그 당시 제일 인기 있던 지우개는 단연코 '코스모스'표 지우개였다. 승걸이는 아버님의 운영하시는 곳에서 항상 최고의 지우개를 공수받았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셈이 빨라서 '고스톱' 칠 때 점수 계산이나 정산 시에 주로 심판관 역할을 했다. 그런 그 친구가 지난주 스크린 골프 칠 때는 숫자 계산이 좀 무뎌진게 느껴젔다. 세월은 그 누구도 비껴가질 못하나 보다. 몇 년 전부터는 늦깎이 직장 생황을 하느라고 요즘 제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결혼하기 전부터 언젠가는 공동의 별장을 만들어 은퇴 후에 여유 있는 삶을 살자는 의미에서 '별장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섯 명의 독수리 오 형제는 이제 배우자들과 자녀들을 포함하면 모두 20명으로 늘어났다. 거의 30여 년 동안 부부동반으로 모임을 하다 보니 이제는 남사친의 아내인지, 여사친의 남편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작년 초부터 남성 총무의 제안으로 부부산악회를 결성하여 월례 산행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송년회를 여성 총무님의 집에서 홈 파티를 계획했었다. 결국 갑자기 정부의 코로나 방침으로 인해 취소되어 아쉬웠다.


하지만 이렇게나마 추억을 되새기는 '2021년 송년의 글' 로 대신하고자 한다.

내년 한해 동안 모두의 행복과 건강을 빌어본다. "해피뉴이어, 별장계 멤버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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