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입에 실패하고 깡소주를 들이켰던 어느 밤. 무작정 신청한 국립중앙박물관 청년멘토.
이후 나는 우수멘토까지 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사람이 고팠나보다. 그리고 말하고 싶었던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매번 무시당하던 내가 인정받았던 것이 이때 였던 거 같다.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났다. 2년이나 지났을까.
어느새 나는 우수청년멘토가 아니라, 언시생이 됐고.
대학생이 아닌, 졸업생. 말이 좋아서 졸업이지, 사실상 백수랑 뭐가 다를까.
내 앞에 놓아진 수 많은 밥상. 잘차려진 밥상은 내가 걷어찼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취업도 실패하고, 사람도 다 떠나고, 겨우 찾아온 사랑도 떠나보낸 후 날 맞이한 것은 우울증과 불면증.
결국 이것들이 날 한동안 괴롭혔다.
많은 고민을 했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나. 행복을 찾고 싶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했을 때가 언제였을까.
아무 생각 없이 박물관에서 해설 하던 그때가 그리웠다.
용기를 내기에는 너무 무서웠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지 않을까. 그때 이후로 날 맞이했던 것들이 전부 악몽 같았다.
공포가 날 엄습했을 때 내가 선택한 것.
"마지막이라 생각하자."
주변의 만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인데, 저번에 한 것을 또 한다고?" 라는 차가운 반응.
맞는 말이다.
나는 해설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PD가 되고싶은 거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때의 온기가 그리웠다.
어딘가 날 반겨주고, 내가 준비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 나는 그 공간이 너무 그리웠다.
하지만 교육부터 테스트까지 처음부터 다 해야했고,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이 더 많다.
내게 많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다가가는 용기. 하지만 트라우마가 꽤 무섭더라.
다가가면 떠날 거 같다는 두려움. 내가 마주한 것들은 공포였다.
'적당히 선 긋자.' 라는 마음은 그 공포를 떨쳐내고 싶었던 일종의 방어모드였다.
나보다 나이 어린 애들 앞에서 가슴 부풀려봤자 아이들 눈에는 '꼰대' 로 보지 않을까.
내가 처음 멘토를 시작했을 때 형 누나들의 나이가 지금 내 모습이기에, 더욱 실감이 됐다.
처음 마주했을 때 그냥 눈인사만 하자는 내 신념.
하지만 이것이 본능이라하나. 먼저 반갑게 말거는 태도는 왜 안사라질까.
그렇게 하면 또 언젠가 상처받을텐데
앞에서는 친한 척, 뒤에서는 아닌 척. 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은데..
하지만 그 태도는 내 일종의 철학인 거 같다.
어쩌면 내가 마주한 사람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던 하나의 철학 때문에 그 태도가 안 사라진게 아닐까.
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렇게 맏형으로서 2025년 국립중앙박물관 청년멘토를 시작했다.
일명 경력직 신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