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철학자들

by 이만희

교실의 공기는 소리와 감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들의 흰 지팡이가 바닥을 더듬는 소리, 점자책 위를 스치는 가느다란 손가락의 속삭임, 서로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방향을 가늠하는 미세한 떨림. 시각장애학교 교사인 내게 세상은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감각으로 가득한 곳이다.

얼마 전, 칸트와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한 작가의 글을 읽었다. 철학의 소임을 '비판'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낸 그 글이, 내게는 곧 교육의 소임처럼 다가왔다. 칸트가 보여준 지식비판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성찰하는 일이다. 마르크스의 사회비판은 우리를 억압하는 구조를 파헤치고, 그 안에서 진실이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 두 가지 비판이 내 교실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 아이들은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한다. 그들에게 세상은 처음부터 스스로 재구성해야 할 대상이다. '저기 사과가 있다'는 명제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손으로 만져본 둥근 감촉, 코끝을 맴도는 달콤한 향기,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아삭한 소리와 입안에 퍼지는 과즙의 기억이 합쳐져 비로소 '사과'가 완성된다. 이것이 살아있는 지식비판의 과정이다.

나의 역할은 정답이 그려진 지도를 쥐여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자신만의 지도를 그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선생님, 세상은 어떤 모양이에요?"라는 질문에 나는 섣불리 답하지 않는다. 대신 "네가 만져본 세상은 어떤 모양이었니? 네가 들어본 세상은 어떤 소리를 냈어?"라고 되묻는다.

한 아이에게는 소리가 세상을 구성하는 중심축이고, 다른 아이에게는 촉감이 그 역할을 한다. 아이들 각자가 자신의 이성으로 '불가피한 가상'을 넘어설 때—눈으로 보는 것만이 진실이라는 세상의 편견을 비판하고 넘어설 때—그들은 비로소 지식의 주체가 된다. 칸트가 사유를 통해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했듯, 아이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며 진정한 지적 자유를 배운다.

하지만 아이들이 마주한 세상은 때로 차갑고 불편한 구조물이기도 하다. 비장애인의 시각을 기준으로 설계된 사회는 아이들에게 수많은 장벽을 제시한다. 길가의 작은 턱, 소리 없는 신호등, 점자 안내가 없는 건물. 이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억압이다.

"왜 우리는 더 불편해야 해요?"

아이의 물음은 사회의 부조리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너희의 불편함은 너희가 나약해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라고.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한다.

서로의 지팡이가 되어주고, 서로의 눈이 되어주는 교실 안에서의 작은 연대. 그것은 거대한 사회의 편견에 맞설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강력한 무기가 된다. 마르크스가 인간다운 자유가 확보될 때 비로소 세상을 정확히 볼 수 있다고 했듯,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서로를 포용할 때, 그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갈 힘을 얻는다.

교실의 창문 너머로 해가 저문다. 나는 종종 어둠 속에 홀로 남아 아이들의 빈자리를 바라본다. 오늘 하루, 나는 아이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단단히 구축하도록 잘 도왔는가. 이 사회의 편견에 맞설 작은 용기라도 심어주었는가.

칸트의 정직한 이성과 마르크스의 따뜻한 연대를 가슴에 품고, 나는 내일 다시 아이들을 만날 것이다. 어쩌면 세상을 보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그들만의 빛을 찾아가는 이 작은 철학자들일지도 모른다.

그 아이들의 손끝에서, 귓가에서, 나는 오늘도 삶의 가장 깊은 의미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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