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 고마워요 지브리, 땡큐 바나나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제일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주공아파트 4층 계단을
오르내리던 그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사람들 앞에선 웃고 다녔지만
사실 나는 거의 말라 있었다.
마치 끝없는 덤불 속을 막 헤매고 다니는 기분이었는데
어디 풀 곳이 없었다.
시간도 돈도 여유가 없었다.
춤 바람에 지르박을 땡길 수도 없고…
그때 즈음
모노노케 히메를 만나 엄청난 전율을 느끼고 하울을 사랑하면서
지브리애니메이션을 몽땅 섭렵했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었으니까
집에서는 지브리를 만나고
출퇴근 버스 안에서는
요시모토 바나나를 읽었다.
'키친'을 읽는데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너무 좋았다.
그때의 나는
나의 힘듬도 혼자 삭여내야 했던 시절이라서
지브리와 바나나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책 읽는 내 모습이
좀 근사해 보이기도 했고.
나 혼자만을 위한 위안이었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토요일 밤이면
과자를 잔뜩 꺼내 놓고
다음 날 아침까지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봤다.
그게,
그 시절
나에게 허락된
가장 큰 일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