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고

Fargo, 1997

by 유브로
212919_179182_3236.jpg

눈 덮인 마을, 파고. 제리는 빚을 해결하기 위해 아내를 납치해 장인에게 돈을 뜯어내려는 심산이다. 제리는 심부름꾼 칼과 게어를 고용하고 딱히 가까워 보이지 않는 칼과 게어는 제리의 아내를 어설프게 납치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칼과 게어가 목격자를 살해하게 되면서 모든 계획이 꼬이기 시작한다. 임신한 경찰 서장 마지가 사건을 맡으면서 이야기는 더욱 꼬여간다.


미국 노스다코타에 실제로 존재하는 파고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 <파고>. 촬영은 파고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진행했다고 한다. 오프닝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표기하지만 이는 코엔 형제가 관객 몰입을 위해 연출한 일종의 거짓말, 장난이다. 이 거짓말을 믿고 영화 속에서 칼이 숨겨놓은 돈가방을 찾으러 떠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코엔 형제식 부조리극이다. 어딘가 하나씩 모자란 인물들이 돈을 좇아 범죄를 저지르지만, 정작 돈가방은 눈 속에 묻혀 아무도 손에 넣지 못한다. 그 사이 죄 없는 사람들은 목숨을 잃고, 범죄를 꾸민 이들은 결국 죽거나 체포된다.


영화가 약 30분쯤 진행되었을 때, 그러니까 제리의 아내가 납치되고 칼과 게어가 납치를 숨기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뒤, 비로소 영화의 사실상 주인공이자 해결사인 마지가 등장한다.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한 마지는 등장만으로도 기존 범죄물의 주인공들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새벽 출근을 위해 일어난 그녀에게 남편은 정성껏 아침을 차려주고, 살인사건 현장으로 향한 마지는 동료 형사와 날씨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시체를 조사하다가 입덧을 하기도 한다. 마고는 임신 중인데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식사를 꼭 잘 챙겨 먹는다. 용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조사하고 나서 근처에 식사할 곳이 있냐고 묻기도 한다. 언제나 차분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하다. 단, 자신에게 따뜻한 사람에게만 그렇다. 자세한 사건 조사를 위해 파고를 찾은 마지는 TV에서 자신을 본 적이 있다는 동창을 만나게 된다. 이상하게 다가오는 그에게 깔끔하게 선을 긋지만,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친절한 태도는 유지한다. 그녀에게 살인사건 조사는 정말 일이고, 본인의 평범한 삶을 계속 살아가고 있다.


<파고>에서의 범죄는 일상과 굉장히 가까이 있다. 어딘가 부족한 게어는 제리의 아내를 유괴하고 팬케이크 집에 들르자고 하기도 한다. 칼은 주차비 때문에 성질을 내면서도 꾸역꾸역 돈을 낸다. 마을 한켠에서 범죄가 일어났지만 사람들은 날씨 얘기를 편하게 하기도 한다. 칼은 결국 게어의 손에 죽어 분쇄기에 갈려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데 이때 게어의 침착한 모습도 너무나 일상적이라 충격적이다. 그런 게어의 최후가 자신이 죽였던 목격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야말로 이 부조리극의 완벽한 결말이다.


마지는 본인이 체포한 게어에게 돈이 중요하다고 해서 인간보다 중요하냐고, 침착한 말로 본인의 생각을 전한다. 이해할 수가 없다며 그녀는 이 범죄의 세상과 본인의 세상도 선을 긋는다. 그러나 그녀의 삶엔 이미 범죄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와 있다. 범인은 체포했지만 마고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미 죄 없는 사람들은 죽고, 평범한 가장은 돈 때문에 범죄를 저질러 그의 아들은 엄마도 잃고 아빠도 잃었다.


Far go. 마지를 제외한 캐릭터들은 돈에 눈이 멀어 본인의 인생을 꼬고 꼬아서 멀리 가버린다. 마지만이 오히려 욕심부리지 않고 평범하지만 아늑한 지금 눈앞의 삶을 살아간다. 본인의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며 내일의 삶을 또 걱정하면서, 그렇게 평온하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마치 이런 범죄로 점철된 세상에서도 그럼에도 살아가야 함을,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몸소 보여준다. 따뜻한 사람들을 주변에 두고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잘하며, 늘 잘 먹고 잘 지내려고 노력한다.


기본 범죄물의 리듬감이 아니라 본인들의 리듬감으로 만들어낸 코엔 형제의 <파고>는 그 존재감이 강한 영화다. 범죄자부터 주인공까지 범죄물의 클리셰를 깨며 또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정말 삶에 찌든 가장 역할에 너무 잘 어울리는 윌리엄 H 머시가 극의 초중반을 이끌고 부세미와 피터 스토메어가 연기한 칼과 게어의 호흡이 극에 코믹함과 긴장감을 더한다. 그러나 등장부터 특유의 분위기를 뿜어내는 마지라는 캐릭터를 완성해 낸 맥도먼드가 단연코 훌륭하다. 짧은 등장과 폭발적인 장면이 없음에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 납득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하얀 눈으로 덮인 고요한 도시 파고 그 자체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동시에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곳. 어떤 범죄도 눈에 묻혀 자취를 감출 것 같고,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웃들도 때로는 서로의 삶에 무심할 것만 같다. 따뜻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차갑고 섬뜩하게 느껴지는 도시. 이 모순된 공간을 묵직하게 담아내는 로저 디킨스의 촬영 덕분에 영화는 내내 묘한 불안과 위험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것이 이 영화가 그려내는 인간의 삶 그 자체 것이다. 평온함 속에 언제나 존재하는 불안.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한 마지는 파고라는 도시 그 자체를 닮아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눈 덮인 도시에서 헤매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신비롭고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영화가 오랫동안 기억되는 이유는 꼬이고 꼬이는 플롯이나 흥미로운 캐릭터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영화가 따라 할 수 없는 <파고>만이 갖고 있는 이 겨울, 이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허드서커 대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