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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정 Jun 08. 2024

진진묘(眞眞妙)

    

                                                    

  재경(在京) 여고 동창회에는 몇 개의 소모임이 있다. 종교별, 취미별 모임이 있는데 나는 미술동호회 회원이다.  달에 한 번 전시회장을 찾고, 같이 점심 먹으며 교제를 나눈다.


  지난 11월에는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장욱진의 전시회를 찾았다. ‘가장 진지한 고백 : 장욱진 회고전’이다. 장욱진 그림은 몇 번 다른 전시회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많은 그림이 전시된 것을 본 것은 처음이다. 270여 점의 그림이 미술관 1, 2, 3, 4관에 주제별로 전시되어 있었다. 장욱진 미술재단이 있고 양주에 장욱진 미술관이 있으니 거기에 있는 미술품을 모았겠지만, 개인 소장된 작품도 많이 모아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 것이다. 아주 오래전 일본인에게 팔렸던 그림까지 어렵게 구해 전시하고 있는 것을 보며 이번 전시회를 위해 애를 무척 많이 쓴 느낌을 받았다. BTS의 RM의 개인 소장품도 6점이 있다는데 혹시 그 작품에 너무 사람이 몰릴까 해서 어느 그림인지 밝히지는 않았다.


  장욱진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만큼 좋아하는 화가이다. 우리가 전시회장에 간 날이 전시회 시작 후 두 달이 된 날인데도 사람들이 참 많이 왔다. 도슨트의 그림 설명을 듣기 위해 어찌나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는지 전시관 안내인이 길을 내 달라는 부탁을 몇 번이나 하곤 했다. 까치와 어린아이와 나무와 해와 달 등의 소재들을 가지고 너무나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장욱진의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참 따뜻하게 한다.     


  12월, 비 오는 겨울날이다. 오늘 같은 날씨에는 전시회에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좀 더 조용하고 한가롭게 그림을 보러 덕수궁을 다시 찾았다. 장욱진의 그림 중 어느 하나 좋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3관 앞쪽에 걸려있던 <진진묘>가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3관은 ‘참으로 놀라운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진진묘는 장욱진의 아내 이순경의 법명이다. 즉 이 그림은 화가의 부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진묘는 부처의 참된 이치를 재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아마 그런 이름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진진묘>를 참으로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해석하고 있다.


  <진진묘>는 아내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화상이 떠올라 그린 아내의 초상화이다. 1월의 어느 추운 겨울날, 추위 때문에 서울집에 와 있던 장욱진은 덕소 강가 아틀리에로 달려갔다. 그가 서울대 교수를 사직하고 덕소에 있는 아틀리에에서 12년 동안 그림을 그릴 때다. 문명으로 표상되는 서울을 떠나 한강이 가까이 흐르는 덕소에 화실을 꾸민 이유는 그곳이 무척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덕소로 가는 길이 비포장이었던 시절, 사람들은 문명을 떠나 타히티로 갔던 고갱처럼 그를 인식했다 한다. 덕소 아틀리에로 달려간 그는 어떤 영감에 사로잡혀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자지 않고, 자신도 잊은 채 거의 일주일을 냉골의 방에서 작업을 했다. 목숨을 건 작업이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당신 보여 주고 싶어서 단숨에 달려왔어. 자신 있는 그림이야.”라고 했다.


  그는 그때 어떤 영감에 사로잡혔을까? 아내가 기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을까? 곰곰 생각해 보면 그는 그때 아름다움(美)을 창조하고 있었다고 본다. <진진묘>는 어찌 보면 5살 어린 여자아이 같기도 하고, 관음보살 같기도 하다. 보면 볼수록 신비한 그림이다. 33 ×24cm 작은 캔버스에 심플하게 골격만을 그렸다. 그 작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근 200시간을 자신마저 잊은 것이다. 장욱진은 높은 예술가가 다다르는 경지, 회화적인 수식은 건너뛰고 골격만을 제시하는 경지에 갔다고 본다. 김정희 <세한도>가 그러하다. 자코메티의 조각 <걸어가는 사람>을 봤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화가 장욱진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을 평생 할 수 있었던 복 있는 분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하는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 숨어서도 그리고, 매를 맞아가면서도 그림을 그렸다. 고등학생 때인 1938년, 조선일보 주최 전국 학생 미전에서 최고상을 받으면서 집안 어른의 허락을 받게 되어 마음 놓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도 그림을 그렸다. 화가는 모름지기 자기의 내면세계를 그림으로 말한다고 하였다. 그는 위선을 가장 큰 죄로 알았고, 가장 진지한 자기 고백을 그림을 통해 일생동안 하였다. 그림 <진진묘>를 보며 그의 말을 다시 되새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미의 승리를 확신하고 캔버스를 향해 감행하는 영혼의 도전이 아닐까.”


  글을 쓴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는 자기의 내면세계를 글로 말한다. 위선을 멀리하고, 진실을 향해 감행하는 깨달음의 도정(道程)이다. 특히 수필은 더욱 가장 진지한 자기 고백이다.    

  

  흩어져 있는 그림을 모아 대규모의 회고전을 또 할 수 있을까. 한 점 한 점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 270여 점을 다시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을까? 그의 분신 같은 까치, 온 세상을 품은 우주 같은 나무가 눈에 선하다. 전시회가 끝나기 전에 나는 까치, 나무와 함께 <진진묘>를 보기 위해 한 번 더 갈 것 같다.



     -《에세이21》 2024.여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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