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을 의무적으로 드려야 했던 기독교 대학에 입학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채플 시간이 좋아 교회까지 나가게 되었다. 나는 유교적 전통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척 가부장적인 분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을 제사도 안 지내는 근본 없는 예수쟁이라며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내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탐탁히 여기지는 않았지만 막지는 않으셨다. 내가 교회에 나가기 전까지 가족은 물론 친가 외가에 단 한 명의 교인이 없었다.
대학원을 다니다 결혼을 했다. 남편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이기풍 목사님의 전도를 받고 신앙을 받아들인 제주도의 초대교인 가정이었다. 시할아버지는 신앙을 지키다 멍석말이를 당하는 등 갖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을 견디신 분이었다. 시댁에는 기도실이 있었는데 구십 넘은 시할머니는 매일 하루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드렸고, 시부모님 역시 평생을 새벽 기도하시는 장로님 가정이었다.
아이 둘을 낳고 대학에 시간 강사로 나가기 시작했다. 몇 년 시간 강사 끝에 전임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 나는 육아와 일 사이에서 무척 헉헉대고 있었다. 시어머니도 친정어머니도 육아를 도와줄 형편이 못 되고, 지금같이 탁아시설도 없을 때 오로지 일하는 아줌마의 도움을 받았는데 아기에게 문제가 생겼고 육아와 일 사이에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아침 금식 100일을 작정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내 문제 해결을 위해 시작한 기도였는데 50일 쯤 지나서부터는 친정 부모님 구원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하게 되었다. 작정기도가 끝났을 때 나는 학교를 그만두는 쪽으로 선택을 했다. 놓치기 아까운 것을 내려놓으며 다시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런데 참 놀라운 일이 그 해에 일어났다. 그렇게 교회에 부정적이던 친정 부모님이 교회에 나오시게 된 것이다. 참 좋으신 하나님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하고 놀라운 것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아버지는 몇 년 신앙생활 하시다 돌아가셨는데 가족이 다 교회에 나갈 것을 유언하셔서 모든 친정 식구들의 구원이 이루어졌다.
몇 년 동안 전업주부를 한 후 나는 세 아이의 엄마로 다시 직장에 다니게 되었는데 또 다시 그만두어야 하는 사정이 생겼다. 그때 역시 남편의 전근으로 인한 육아문제가 제일 큰 원인이었다.
대학 3학년 때 주님을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한 후 나는 나 자신이 사회에, 복음에 빚진 자라는 인식을 하였고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사는 소명을 품었다. 나는 직업을 통해, 내가 하는 일을 통해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번번이 벽에 부닥치며 좌절을 겪으며 내가 품었던 꿈을 다 내려놓아야 했다. 아이도 잘 키우며 자기 일에도 성공한 여성들도 많은데 나는 왜 이렇게 강하지 못할까 절망할 때도 있었다
마음 속 깊은 목마름이 있어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2004년 《계간수필》을 통해 등단했다 또 아이들이 크면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수필을 쓰며, 자원봉사를 하며 나는 내려놓았던 꿈을 다시 꾸게 되었다. 하나님은 길이 끝난 곳에서 또 다른 길을 보여주셨고, 하나님은 내가 포기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참 좋으신 분이셨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느끼며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았을 텐데 주님을 만난 후 좀 더 깊고 높은 이상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오늘도 나는 선한 이웃이 될 것을 꿈꾸며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의 눈으로 봐 주실 것을 기도하며 살고 있다.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올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