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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정 Nov 16. 2023

만덕 할망

                  

   한 여인이 있었다. 여성의 활동이 부자유했던 조선시대에 태어나 기녀가 되었다가, 거상이 되고, 신화가 된 여인이다. 제주 사람들은 그녀를 ‘만덕 할망’이라 부른다. 만덕 할망은 제주민의 생명의 어머니이다.


   제주로 겨울 여행을 왔다. 나는 제주시 동쪽 끝자락에 있는 사라봉에 올랐다. 푸른 바다 바로 옆 깎아지른 절벽 따라 산책길이 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책길이라 감탄하며 그 길을 오른다. 정상에 서서 끝없이 펼쳐져 있는 파란 제주 바다를 본다. 바로 눈앞에는 제주항이 보인다. 그곳이 바로 만덕 할망이 장사를 하던 건입 포구다.


  그곳에 만덕 할망은 객주를 차렸다.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며, 검소한 생활과 뛰어난 상술로 큰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귤, 미역, 전복 등 제주의 특산물을 육지에 내다 팔고 제주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들이는 무역업을 했는데 그 수요를 잘 헤아렸다. 또 제주에 많은 좋은 말총을 이용해 갓을 주문생산하기도 했다. 그녀는 드디어 제주 제1의 거상이 되었다.


  사업을 시작한 지 삼십여 년, 그녀의 나이 오십 중반이 되었을 때 제주에 큰 흉년이 들었다. 어진 정조 임금 때의 일이지만 극한 상황에서 수많은 섬사람들이 굶어 죽어갔다. 흉년이 4년째 계속되던 해, 만덕 할망은 일생일대의 큰 결단을 하였다.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곡식을 사들였다. 그리고 죽어가던 수천의 생명을 살려내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넘어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줄 수만 있으면, 단 한 사람에게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삶의 보람인데 만덕 할망은 수천의 사람에게 생명의 은인이 된 것이다.


  나는 그때 그녀가 큰 모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고, 결코 쉽게 모은 돈이 아니었다. 제주 제1의 거상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던 그녀에게 돈은 자식이고 생명이었다. 그녀는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마음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자라났던 것 같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아보라.’


  문을 잠그고 그 속에 안주하고 싶은 생각과, 문을 열고 또 다른 삶의 방식에 발을 내딛는 것, 선택의 기로에서 크게 고민했을 것이다. 그녀는 문을 열었고 그 문턱을 넘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바치자고. 그 후 만덕 할망은 그 이전의 여인도, 그 이후의 어느 여인도 누리지 못했던 인생을 살게 되었다.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영광이었다.


  전 재산을 풀어 백성들을 구휼한 후 1년이라는 시간이 아무 일도 없이 지났다. 제주목사는 이 구휼 소식을 뒤늦게 조정에 보고하였다. 정조 임금이 감격하여 그녀에게 소원을 물었다. 그녀는 서울에 한 번 가서 임금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 이천 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하였다. 본래 탐라의 여인이 바다를 건너 뭍에 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니 이는 곧 국법이었다. 임금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영의정 채제공은 그녀의 전기〈만덕전萬德傳〉을 지어 찬양하였고, 많은 벼슬아치들과 시인들이 시를 지어 그의 인품을 칭송하였다. 다산 선생은 그 시를 모은 책 〈증별시권贈別詩卷〉을 제(題)한 글을 썼다.      


    “ 나는 만덕에게는 세 가지의 기특함과 네 가지의 희귀함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기적에 있던 여자로 수절한 것이 하나의 기특함이고, 많은 재산을 기꺼이 내놓은 것이 두 번째 기특함이고, 바다 섬에  살면서 금강산을 좋아함이 세 번째 기특함이다. 그리고 여자로서 겹으로 된 눈동자이고, 천한 여자로 나라의 역마의 부름을 받았고, 기생으로 중을 시켜 가마를 매게 하였고, 섬 여자로 임금의 사랑과 많은 선물을 받음이다.”   

    

  나는 사라봉을 내려와  사라봉 입구에 있는 모충사에 들렀다. 모충사에는 김만덕 기념탑이 서 있는데 이곳이 그녀의 묘이기도 하다. 그녀는 74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자신의 시신을 제주성이 다 내려다보이는 곳에 묻어달라고 했다. 지금 묘가 있는 곳 가까운 장소이다.


  영정 앞에 소담한 꽃다발이 놓여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손으로 만든 종이꽃이다. 하얀색 종이로 일일이 정성껏 만든 꽃다발이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삼사 개월에 한 번씩 새 꽃으로 바꿔놓는다고 하였다.


  ‘아! 만덕 할머니를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 또 있었구나.’


  나는 가슴이 뛰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에 귀양 왔다가 만덕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감동을 받고 은광연세恩光衍世 라는 글씨를 남겼다.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번지다.’ 는 그 글의 뜻대로 만덕 할망의 사랑의 빛이 온 세상에 번져 이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의 가슴을 젖게 하고 있음을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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