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민정 Feb 19. 2024

밤비

          

  지난밤에 비가 내렸다. 오랜 가뭄 끝에 기다리던 비다. 충분히 해갈할 만큼 내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메말랐던 땅을 촉촉이 적실만큼은 왔다. 그런데 나는 빗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냥 자버렸다.


  20년 넘게 살던 집을 떠나 이사를 했다. 1층에서 8층으로 아파트를 옮겼다. 전에 살던 집은 아파트이긴 했지만 베란다 앞쪽으로 마당이 붙어 있었다. 넓지는 않아도 마당에는 감나무 매화나무 라일락 모란도 있고 키 큰 향나무도 세 그루나 있었다. 잔디를 조금 파내고 밭도 일구어 상추도 심어 먹었다. 집 뒤에는 어린이 놀이터가 있고 키가 큰 너도밤나무와 은행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전원주택 같은 아파트였다.


  비가 오는 날 나는 큰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길 좋아했다. 나는 숲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고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나무들은 아버지가 딸이 마당이 있는 좋은 아파트로 이사한 것을 무척 기뻐하며 식목일 날 심어주신 것이라, 나무를 보고 있으면 아버지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아버지는 나무를 심어주시고 그 2년 후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밤비가 오는 날은 나는 그 빗소리가 듣기 좋아 늦게까지 자지 않고 비 오는 소리를 들었다. 또 한밤중 자다가 비 오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면, 그냥 자버리기가 아까워 아이들이 쓰던 빈방에 가서 창문을 다 열고 방바닥에 혼자 드러누워,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듣곤 했다. 그 소리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은 감동을 주고, 순간이동을 하듯이 나를 그리움의 어느 장소로 데려가기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행복하게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던 비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냥 밤새 쿨쿨 자버린 것이다. 8층 아파트에서는 비 오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시멘트 바닥에 톡 톡 빗방울 깨어지는 소리도, 잔디밭에 쏴 솨 조용히 빗방울 스며드는 소리도, 무성한 모란 잎에 토닥토닥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언제부터 밤에 비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지 알 수는 없는데 ‘밤비’ 하면 바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십여 년 전, 교회 중고등부 여름 수양회에 따라갔다. 서너 명의 엄마들이 아이들 밥을 챙겨주기 위해서 간 것이다. 여름 수양회는 시골에 있는 교회에서 했는데, 교회 바로 옆에는 수십 채의 비닐하우스와 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


  여름밤 소낙비가 쏟아졌다. 잠시 지나가는 비인 줄 알았는데 밤새 비가 내렸다. 비닐하우스 지붕 위에 투당투당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교회당 양철지붕 위에 우당탕탕 빗방울 소리는 더 요란했다. 교회당 옆 논에선 개굴개굴 개구리 우는 소리가 밤새 들렸다. 몇백 아니 몇천 마리가 되는지, 어찌나 악을 쓰며 울어대던지 ‘쟤네들 엄마 무덤이 진짜 다 떠내려 가나보다.’ 걱정이 될 정도였다. 빗방울 소리와 개구리울음소리, 누가 더 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시합하는 것 같았다. 시끄러워 새벽까지 잠을 자지 못하고 그 소리를 들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 태초의 소리 같기도 하고 원시의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가 그립다. 그런데 요즘도 시골에 가면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에는 들으려고만 하면 언제나 들을 수 있었던 빗소리다. 고층아파트가 생기고 높은 곳에 사는 가구가 많아지면서 집에서 빗소리 듣기도 당연한 일이 아닌 것이  되었다. 특히 밤비 오는 소리 듣기는 더 어려워졌다. 나서부터 고층아파트에서 살아온 아이들은 밤비 오는 소리가 어떤 것인지 짐작도 못 할 것 같다.


  적막한 밤에 눈을 감고 비 오는 소리를 듣는 행복 하나를 잃어버렸다.




작가의 이전글 나무를 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