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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정 Feb 04. 2024

나무를 보며

        

  아버지 눈에 황달이 생겼다. 그것이 가족들에게 감지된 아버지 병세의 첫 증상이었다

.

  “아무래도 급성간염인 것 같아요.”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는 동생의 재촉에 아버지는 마지못해 그렇게 가기 싫어하는 병원에 입원하셨다. 잔병이 없는 아버지는 건강에 자신이 있었고 장수에 대한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계셨다.  이삼 일이면 끝날 줄 알았던 종합검사가 의외로 길어져서 일주일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의사는 가족들을 불러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암입니다.”


  그것도 말기 암이라 하였다. 암이 온몸에 퍼져 수술도 치료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남은 날이 2개월 혹은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며칠 전까지 멀쩡히 회사 일을 잘 보시며 건강하게 사시던 아버지가 단지 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갔다가 그렇게 돌아가셨다. 의사의 예측대로 꼭 두 달 만에. 수술한 번 받아 보지 못하고 치료다운 치료 한 번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홀연히 정말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때 아버지 연세는 예순넷이었고 지금부터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아버지의 생명을  일 년 만이라도 연장할 수 있다면….’


  가족들은 무슨 일이라도 다 했을 것이다. 눈물과 기도로 15년의 생명을 연장받은 히스기야 왕을 생각하며 매일 밤 나는 우리 아버지도 일 년 만이라도 더 살게 해달라고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귀하고 아깝게 다가왔던 시간이 일 년이 지나고 또 지나 십 년이 넘게 흘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십 년이 지났지만 나는 매일 아버지를 만난다. 나무를 보며.


  우리 집 마당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있다. 이 나무들은 아버지가 심으신 것이다. 딸이 마당 있는 넓은 아파트로 이사 간 것이 좋아서 아버지는 식목일날 나무를 심어 주셨다. 잔디를 다시 깔고 철쭉과 영산홍을 심고 라일락, 목련, 꽃사과, 대추나무 사이에 향나무도 심어 조경을 멋지게 해 주셨다. 어린 나무들은 잘 자라 싱싱한 모습으로 마당에 서 있다.


  ‘사람은 가도 나무는 남고….’


  그 남은 나무는 창문을 여는 아침마다, 바깥을 보며 차를 마실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나게 한다.


  아버지는 키가 크고 잘생긴 분이셨다. 내 결혼식에 참석한 우리 과 한 여교수님이 “신부 아버지 참 멋있더라.”라는 말만 자꾸 해 신부를 섭섭하게 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점잖은 분이셨다. 체면을 중시하고 말을 많이 하지 않으셨다. 자식들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야단을 친 적이 거의 없었으나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께 순종하였다.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가족들은 마지막 희망인 민간요법을 쓰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아버지께 병의 증상을 알려드려야 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아무리 점잖은 분이라도 죽음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좋을지 몰라 아까운 시간을 자꾸 보내다가 아주 어렵게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다가온 죽음을 참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버지 성품같이, 점잖고 당당하게.


  “내가 적어도 십 년은 더 살 줄 알았는데…,  십 년 빨리 죽는다고 생각하겠다.”


  당신 죽음에 대해 이 한마디만 하셨다.


  아버지는 남은 한 달여 동안 살아계시던 어느 때보다 많은 교훈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키가 크고 건장하던 몸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고, 나이보다 젊어 보이던 얼굴은 투병 두 달 동안 이십 년은 늙어 버린 것같이 병의 진행은 빠르고 나날이 악화되었다. 그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는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온 친척들과 친구, 회사직원들을 모두 정성스럽게 맞이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아버지 앞에서는 아무도 울지 못했다. 아버지는 암의 고통 때문에 가족들을 괴롭히지도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죽음을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른다. 쉰 살이 넘어 뒤늦게 믿게 된 신앙의 힘이었는지, 그래서 영생에 대한 소망 때문에 그렇게 강할 수 있었는지, 아니면 정말 성격 때문이었는지, 그것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잘 견디셨고 마지막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좋은 일을 하고 가셨다.


  아버지는 이전에도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 집안 어른으로 형편이 어려운 친척들의 학비나 자립을 많이 도와주셨고 회사를 만든 후부터는 공장 종업원들을 내 가족같이 대해 주셨다. 아버지는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운전기사를 생각했다. 당신의 차를 십 년 가까이 운전했는데도 결혼하여 집이 없는 그에게 주택청약통장을 선물로 주셨다.


  목사님은 장례식 날 아버지 성경에 끼워져 있던 메모에 대해 설교하셨다.


  ‘거미 같은 인생, 개미와 같은 인생, 꿀벌과 같은 인생.’


  남에게 해를 주는 거미 같은 생,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개미 같은 생이 아니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꿀벌과 같은 인생을 살기를 원하셨던 분이라고 하였다.


  오늘도 나는 마당의 나무들을 본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겨우내 죽은 듯 말라있던 나뭇가지에 연초록 새순이 돋고 나무들은 생명의 물이 올라 다시 살아난 듯하다. 내 마음의 그림책에 사랑을 주신 분으로 담긴 아버지는 해마다 다시 살아나는 나무 같다.



(2002년에 쓴 글이다. 등단(2004년)하기 전, 습작시절에 쓴 글인데 2010년에 발간한 수필제1집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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