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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정 Jan 23. 2024

《얼굴을 마주 보고》 평론

제5회 수필미학문학상 수상작품집  《얼굴을 마주 보고>

 2024년 1월에 선집이 발간되어 어제 책을 받았다. 더 기쁜 일은 문학평론가로부터 좋은 평을 받은 것이다. 책 뒤에 들어있는 김향남평론가의 작품론은 또 다른 하나의 문학작품이다. 문학에 대한 이해,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글이다. 긴 글이지만 그의 평론을 여기에 소개하는 이유다.




세상을 향한 애정과 연민, 희망의 미학


                                김향남 문학평론가



1. 불균질한 삶과 문학의 꿈      

    

문학의 대상은 우리 삶 속에 늘 풍부하게 널려 있다. 우리가 알고 기억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 속에 문학이 살고 있다. 격렬하고 극단적인 운명의 반전이나 기이하고 특수한 사건뿐 아니라 한산하고 지루해 보이는 인생, 평범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일상들 속에도 문학의 순간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순간이 다 문학으로 비등하지는 않는다. 문학의 순간이란 단 순히 어떤 사건이나 사람만이 아니라, 비루하고 초라하고 쓸데없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을 끌어안고 머무를 때 찾아온다. 어떤 것이라도 ‘다시 보기’라는 필터를 작동하며 의문을 품고 대답을 찾고 해명을 기다릴 때, 그럴 때 찾아온다. 문학은 어떤 특별한 순간이나 별다른 소재가 아니라 그것을 선택하는 남다른 시각으로부터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의 순간은 균질하지 않다. 평범하게 혹은 무심하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 새삼 불균질한 어떤 것을 붙잡는 것이다. 장강처럼 유유해 보이는 삶이라도 거기에는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으며, 불같이 뜨거운 날도 있고 얼음처럼 차가운 날도 있기 마련이거니와 크든 작든 우리는 균열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그에 대해 저항하거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대적하는 순간도 있지만, 곧 무디어지거나 익숙해져서 일상 속에 매몰되거나 적응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기야 삶의 매 순간을 저항하고 대적하며 살기란 불편하고도 피곤한 일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균질하고 균형 잡힌 삶이지 울퉁불퉁 불균질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은 기꺼이 그것을 감수한다. 문학은 불균질한 일상의 사건들을 마주하고 질문하며 회의하고 서성이고 머무른다. 무질서한 삶의 현장을 파고들며 내면의 슬픔을 응시하고 고통을 함께한다. 자신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향한 인식의 폭과 깊이를 더하며 삶을 성찰한다. 세상에 던져진 불균질한 틈새를 찾아 고르게 다지고 촘촘히 메꾸며 더 나은 삶을 촉구한다. 뒤엉키고 흩어지고 단절된 의식에 뼈대를 세우고 질서를 추구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권민정의 수필 선집 《얼굴을 마주 보고》는 기꺼이 문학의 소명을 감수하고 이행한다. 작가는 세상의 그늘을 응시하고 그 불균질한 틈새를 사유하며 자기 삶을 성찰한다. 불화하고 불평등한 삶의 부조리를 파고들어 어떤 방향성을 모색한다. 힘센 자와 약한 자가 서로를 헤아리며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꿈꾼다. 세상을 향한 그의 시선은 연민으로 가득하고, 그가 써 내려간 문학의 순간들은 아프면서도 따듯하다.

  

                

2. 세상의 약자들을 향한 연민의 시선  

        

작가 권민정은 삶의 그늘과 모순, 존재의 결핍과 부조리를 감지하고 그로부터 공감과 연민, 공동체 의식의 회복을 소망한다. 이를테면 작가는 조선소 하청노동자, 무허가 판자촌 사람들, 동물원에 갇힌 동물, 양공주, 결손가정의 아이들과 장애인, 학대와 폭력에 희생된 어린아이와 같은 사회의 약자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의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를 겹쳐 놓는다. 다시 말해 작가는 소외된 약자들의 삶과 자신의 체험적 사실을 소환하여 그 실상을 비춰 보고, 나아가 모두가 함께하는 세상을 바란다.


이 작품집을 관통하는 기조적 흐름은 사회의 약자들을 향한 연민의 정서라 할 수 있다. 연민이란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괴로움에 대해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되는 것으로서 인간의 윤리적 인식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불행하고 소외된 사람에 대한 연민은 나눔과 배려, 소통으로 이어짐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풀어가는 계기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스바움(M. C. Nussbaum)은 사람들이 대상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인지적 필요조건을 세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고통이 사소하기보다는 심각한 것이라는 믿음 또는 평가, 해당되는 사람이 고통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 이 감정을 느끼는 사람의 가능성이 고통을 겪는 사람의 가능성과 흡사하다는 믿음, 즉 자신도 같은 고통에 직면할 수 있음을 아는 것(《감정의 격동2 연민》, 새물결, 2015, 562쪽)이 그것이다. 덧붙이면 연민의 감정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올바른 가치평가나 판단 하에 발현되는데, 연민 윤리를 실천하는 데는 그 고통의 내막을 세세히 들여다보고 정확히 판단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든 타인의 고 통 앞에 멈춰 서는 것이며, 그 고통이 그 사람에게 합당한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민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선한 감정(<어느 모자의 죽음>)”으로서, 이러한 인식은 권민정 수필을 추동하는 핵심 기제로 기능한다. 그는 자주 연민에 사로잡힌다. TV 뉴스를 보다가, 책을 읽 다가, 또는 상담하는 아이들을 통해 그들이 처한 불행한 현실과 맞닥뜨리며 오래도록 서성이고 함께 아파한다. 이는 그가 누구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또 그것을 내면화했다는 단서이며, 취약한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의 고통을 작품 안에 형상화하고 있다는 근거이다.


우리는 누구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 완전히 무관 심할 수는 없다. 다른 동물과는 달리 사람은 인간성(humanity)이라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해 같은 종으로서 느끼 는 동포 감정 (fellow-feeling)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동포 감정은 인간 본성 안에 있는 도덕의 한 원리로 경험(김용환, 〈공감과 연민의 도덕적 함의〉, 《철학》76집, 2003, 162쪽) 되어짐으로써 삶의 한 축을 담당한다. 동포 감정은 곧 연민의 감정이며, 연민은 일차적으로 타자의 고통과 불행에 반응하는 감정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행복과 행운에 쉽게 공감하기보다 그의 고통과 불행에 더 공감하기 쉬운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고통과 불행에 시달리는 ‘그늘’의 존재들이다. <얼굴을 마주 보고>, <낙원구 행복동>, <전쟁 같은 맛>, <밝은 곳으로 갔을까>, <소영이>, <그늘에서 피는 꽃>, <차드에서 온 소식> 등 모두 고통받는 약자들에 초점이 맞춰 있다. ‘그늘’이란 햇볕이 들지 않는 음지를 말하거니와 춥고 어둡고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제대로 생장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따라서 마땅히 조건을 바꾸고 환경을 개선해야겠지만, 그게 그렇게 낙관적이지는 못하다. 세계는 이미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모순덩어리인데다 현실은 여전히 기아와 전쟁, 범죄의 위협에 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꿈을 꾼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마음으로나 생각으로나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라고 했다. 우리 현실이 점점 살 만하지 못한 곳으로 변해가는지 금, 시인의 말이 어느 때보다 서늘하다.     

    

작품 <얼굴을 마주 보고>는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시위 현장과 불합리한 임금 체계, 그에 대한 작가의 바람을 적은 글이다. TV 뉴스를 통한 간접적인 접촉이지만 화면에 사로잡힌 작가의 시선이 오래도록 붙들려 있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의 내막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여 그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끌어안음으로써 연민의 감정을 투사한다.


작가는 여성 노동자의 근로조건에 대한 논문을 쓴 인연으로 노총 여성국에서 근무한 이력과 김숨의 소설 〈제비심장〉, 그리고 대학 때 도시산업선교회로 실습을 나가 매주 공장 노동자들을 만났던 경험을 소환하며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에 다시금 감정의 격동을 느낀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 고 외치는 그들의 호소를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연민의 감정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작가는 이 곤혹과 딜레마로 가득한 현실을 규탄하거나 연민할 수밖에 없지만,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발견하고 꿈을 이야기한다. 그 꿈은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듯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평 화롭게 사는 세상’이다.


<낙원구 행복동>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의 부음을 접하면서 그에 대한 추모의 마음과 함께 〈난쏘공〉이 쓰일 당시 작가 자신의 체험을 들려준다. 당시 작가는 〈난쏘공〉 이야기 속 바로 그 현장에서, 그 동네 교회에서 운영하던 어린이집 교사를 했고 철거가 시작된 후에는 지역조사 담당 직원으로 일했다. 작가는, 〈난쏘공〉은 소설이나 현실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사실 그대로의 이야기라는 것을 증언하고 작품 속 상황을 재조명 함으로써 문학적 현실이 곧 삶의 현실임을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부수면 다시 짓고 부수면 다시 짓는 그 판자촌의 현장에 있었으면서도, 그때는 울지 않았으나 지금은 울게 된 것. 즉 〈난쏘공〉이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울고 또 울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작가는 그것을 문학의 힘이라고 답한다. 다시 말해 작가는 〈난쏘공〉이라는 문학을 통해 또렷이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현실의 슬픔에는 무감각하면서도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서는 쉽게 눈물짓는 것은, 감각이 무뎌서도 아니고 슬픔을 몰라서도 아니다. 거기에는 작가의 의도가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여러 조각으로 파편화되어 나타나지만 소설이나 영화는 잘 짜인 구조로 압축하여 보여주기 때문에 표현의 효과는 극대화되고 몰입의 강도는 그만큼 높아진다. 현실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카오스 상태지만, 문학의 공간은 현실과는 차별화된 질서의 공간이고 구조화된 공간이다. 문학은 현실과 현실 너머의 무언가를 연결하고 확장하며 격동하게 하는 동시에 현실을 ‘다시 보게’ 하는 거울로 존재한다. 작가는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새삼 깨닫고 또한 밝혀 준다.     

    

<그늘에서 피는 꽃>은 ‘맥문동’과 ‘음지에 사는 아이들’의 유비를 통해 작가의 바람을 이야기한다. 맥문동은 키 큰 나무 아래에서 아주 적은 양의 햇빛으로 살아가는 음지식물이지만 연보랏빛 화 사한 꽃들을 피워 감동을 자아낸다. 청소년 상담사로 활동하는 작가는 이 맥문동과 아이들을 등치시킨다. 아이들의 집은 몹시 가난하고 부모들은 일에 지쳐 그들을 돌볼 여유가 없다. 부모가 이혼했거나 한부모 가정, 심지어 부모 없이 홀로 사는 아이도 있다. 모두 어둡고 그늘진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맥문동’과 같은 존재들이다.


‘맥문동’이 그늘 밑에 살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 감동을 주듯 이, 음지에 사는 이 아이들도 그와 같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작가의 소망이다. ‘어쩌다 같이 먹은 밥 한 끼와 따뜻한 말 한마디가 이 아이들에게 나무 사이로 조금씩 비춰주는 햇빛 같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이들을 향한 작가의 진정이 느껴지는 글이다.


<어느 모자의 죽음>에서 작가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함께 인간 존재의 모순을 꼬집으며 의심하고 회의한다. 내 집에 들어오려는 ‘낯선 존재’를 의심 없이 환대할 수 있는가. 그는 도둑일 수도 있고 성폭력이나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는 위험인물일지도 모 르는데. 그런데도 그를 위해 과연 내 집 문을 열 수 있을까, 하는 물음들이 그것이다. 어느 탈북 모자의 죽음과 그 죽음의 원인이 아사餓死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작가는, 깊은 연민으로  가슴이 쓰리면서도 낯선 자가 찾아왔을 때 과연 그를 환대할 수 있을지를 의심한다. 고통받는 타자에 대한 환대와 배려는 자기희생이 전제되어야 할 터인데, ‘정작 자기희생이라는 단어는 멀리하고 싶은 모순적 존재’가 곧 자신이라는 회의다.


이른바 난민수용 문제가 국제사회의 큰 화두가 되고 있지만, 그 답은 여전히 엇갈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인도적 차원에서라면 거두절미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쳐도, 그에 따른 여러 이해관계가 발생하기 때문에 섣불리 결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경제적 상황과 안보적 위협, 국민적 불안감 등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상황 변수뿐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난관을 도외 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나 돕고 싶은 욕망과 외면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만일 돕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면, ‘그것은 내 힘이 아니라 다른 어떤 힘에 의해서일 것’이라고 겨우 말할 수 있을 뿐 이다. 그것도 ‘타인을 위한 존재’로 오신 이를 믿고 그를 닮기  원한다고 노래한 신앙인이기에 가능한 것일 테다.


일찍이 데카르트가 밝혔듯이 우리는 결국 의심하고 회의하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그러한 회의와 성찰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행간 곳곳에서 느끼게 된다. <어느 모자의 죽음>을 통해 내놓은 작가의 고민은 ‘낯선 타자’에 대한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숙고해야 할 가치이고 덕목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그늘 혹은 어떤 부당함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그것에 대하여 강하게 맞서거나 비판하거나 대결하기보다는 조용히 수용하고 품고 어루만지는 쪽이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 편이 되어서 따뜻이 감싸주고 위로하며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돕기를 자처한다. 작가는 한없이 낮은 자세로써 사회의 약자들을 돌보고 어루만지고자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고, 진지한 회의를 통해 새롭게 자신을 추동하기도 한다. 그것이 곧 작가 권민정이 일구는 문학의 공간이며 연민할 줄 아는 자의 윤리적 태도일 것이다.    


      

3. 시간 더하기 혹은 희망 구하기   

       

M. 엘리아데의 말을 빌리자면 종교적 인간에게 시간은 균질하지 않다. ‘성스러운 공간’과 ‘속된 공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 간 역시 ‘세속적인 시간’과 ‘성스러운 시간’이 있다. 세속적인 시간은 종교적인 의례에 의해서 주기적으로 정지된다. 의례가 거행되는 시간은 성스러운 시간이다. 흐르지 않고 반복되는 시간의 경험이며 근원적인 시간에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 시간 또한 균질하지 않고 균등하지도 않다. 시간은 다르게 체험된다. 어떤 시간은 쏜살같이 날아가 버리는가 하면, 어떤 시간은 선물처럼 혹은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온다.  시간은 태어나고 죽는 것처럼 직선형이기도 하고, 해마다 다시 맞는 의례처럼 순환형이기도 하다. 직선형 시간은 일회적일 뿐이지 만 순환형 시간은 매사 반복적이다. 직선형 시간은 우리에게 허무를 안기지만 순환형 시간은 보상과 의미를 안겨 준다.


<소멸에 관하여>, <나무를 보며>, <시간 더하기>, <마지막 모습>, <숲길을 걸으며> 등의 작품은 시간과 함께 축조된 생의 소멸과 상실, 순환을 드러낸다. 시간은 제가 낳은 자식들을 제 입속으로 삼 켜버리는 크로노스처럼 무자비한 한편,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듯 생생하게 포착되기도 하는 것이어서 막무가내로 우리를 배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은 간간이 우리를 구원해 준다. 시간은 정지되고 환원되면서 새롭게 머문다.


작품 <소멸에 대하여>는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존재의 끝에 대하여, <나무를 보며>는 나무를 통한 생과 사의 순환성에 관하여 쓴 글이다. <소멸에 대하여>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어머니를, < 나무를 보며>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를 그리며 혈육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는 각기 한정된 시간을 살다가 소멸해 가는 유한성의 존재(심지어는 밤하늘의 별들까지도)이고, 그래서 더없이 큰 상실과 슬픔이 어려 들기 마련이다. 가차 없는 시간의 폭거 앞에 삶의 궤 적 또한 순간에 사라진다. 그러나 그 덧없음으로부터 우리는 기꺼이 출구를 찾아낸다. 기억과 표상으로써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춘향이 구름으로 소나기로 언제까지나 도련님 곁에 있겠다고 했듯이(서정주, <춘향 유문>), 생과 사는 시공을 초월하며 끝내 소멸하거나 중단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버지는 아버지 대로의 이야기를 남기며 삶과 죽음을 넘나 든다. 삶과 죽음은 기억과 표상으로써 나란히 우리 곁에 머문다.


마당의 나무는 아버지가 심어 주신 아버지의 나무이고 아버지의 기억이며 아버지의 표상이다. 일찍이 나무는 천계와 지상, 하계를 연결하는 우주수宇宙樹로, 그리고 절대 소멸치 않는 재생의 상징물로 여겨 왔듯이, 마당의 나무는 삶과 죽음의 경계도 없고 상실과 소멸의 한계도 없는 절대적인 무엇이다. 무자비한 시간은 존재의 소멸을 불러왔지만, 나무는 기억과 표상으로써 다시 환원되는 것이다.


<숲길을 걸으며>에서 작가는, 숲길을 걷는 시간이 반복되고 더 해지면서 점차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적고 있다. ‘숲은 생명이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체험케’ 하고, 서로 배려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일깨워주는 ‘스승’이라는 깨우침과 그것을 체득하는 과정이 소박하고 아름답다.


숲으로부터 자연의 이치 혹은 삶의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은, 숲을 향한 반복적인 발걸음과 그곳에서 머문 시간 덕분이다. 발걸음이 반복되고 관찰을 지속하며 머묾의 시간이 쌓였기 때문에 숲은 선물처럼 깨달음을, 교훈을 더해준 것이다. 시간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머물러야 한다. 자연의 이치 혹은 그 의미를 깨우치고 발견하는 데도 머무르기가 필요하다. 현대사회는 가속화로 인하여 시간의 위기를 초래했지만, 고유한 시간의 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머물러야 한다(한병철, 《시간의 향기》). 가볍게 휘발되어 버리는 시간에 무게를 더해주는 것은 의미다.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사유해야 하고 사유하기 위해서는 완만한 속도와 머무름이 필요하다.


<시간 더하기>는 남편의 건강검진 결과를 기다리며 참으로 절박하게 ‘시간 더하기’를 간구했던 일과 제주 표선면 가시리加時里에 있는 ‘시간 더하기’라는 카페에서의 상념을 적고 있다. 시간은 더하고 뺄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더하기는 곱하기가 될 수 있고 빼기는 나누기가 될 수 있는, 시간의 셈법은 딱히 정해진 기준이 없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더하고 뺄 수도 있으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 시간의 속성이다.


 작가는 ‘자기 생명의 길이가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그 시간을 떼어내어 남편의 시간을 더해 주고자, 그래서 누구 한 사람 먼저 가는 일 없이 같이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 간구가 통한 것인지, 정말로 시간이 더해졌던 것인지 다시 환한 시간 속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어느 때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시간 더하기’라는 카 페를 방문하게 되면서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묻는다.


‘시간 더하기’ 카페가 있는 ‘가시리’는 고려의 충신 청주한씨 한천이 조선왕조 개국에 불복하여 제주에 유배된 후 처음 살기 시작한 곳이며, 4.3 사건 때 많은 사람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며 ‘시간을 빼앗긴 한’을 남긴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이곳은 ‘마치 시간을 더한 것 같은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가시리’는 ‘슬픔을 딛고 희망을 일군 마을’이며, ‘시간 더하기’는 ‘절망적인 일을 당한 누군가’에게 다시 희망을 주는 공간이지 않겠는가. 풍요로운 자연과 시원한 바람, 평원을 달리는 말들과 테우리의 노랫소리,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유채꽃과 벚꽃…. 아름다움은 우리를 머무르기로 초대한다. 머무르기는 시간을 고요하게 만들고 정지하게 함으로써 시간을 극복한다. 절망에 빠진 누군가 이곳(시간 더하기)에 머문다면, 그는 ‘기적’처럼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 역시 세상의 그늘을 향한 작가의 아름다운 꿈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4.‘그늘에서 피는 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상처와 분노, 착취와 박탈감, 공포와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타자의 고통을 끌어안고 이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세상의 약자를 위무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상처를 쓰다듬는 사람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품집 《얼굴을 마주 보고》에 담긴 권민정의 작품들은 세상을 향한 연민과 사랑, 그에 대한 소박한 꿈을 담고 있다. 작가는 세상에 대한 애정을 누구보다 강하게 품고 있으며,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는 아름다운 열망을 지니고 있다. 그는 억압된 욕망을 풀어헤쳐 가족의 협조를 얻어내고 당차게 자신의 길을 열어 가는(<30대의 반란>) 성실하고 다부진 영혼의 소유자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 및 노총, 보호관찰소와 청소년 상담실을 통해 꾸준한 사회활동을 해왔다. 이번 수필집은 그 과정에서 얻은 소중한 산물로서 작가 권민정의 삶에 대한 열정과 문학에 대한 순수한 기대를 담고 있다.


문학은 안으로는 인식의 기능을 하고 밖으로는 사회적 작용을 한다. 글을 쓰는 행위 안에는 세계를 인식하는 기능이 숨어 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말로 설명할 때 그것의 맥락을 발견하게 되고, 글로 쓸 때 더 명료하고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글쓰기는 생각이 고여 들도록 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쉽도록 구조화하고 질서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상의 무질서한 경험들 혹은 불균질한 순간들이 글쓰기(문학)의 공간으로 건너오게 되면, 그 과정에 이제껏 알아차리지 못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난다. 경험은 인식을 낳고 인식은 마음을 움직

이게 함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게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마침내 그 어떤 ‘실천’이 될 수밖에 없다.


《얼굴을 마주 보고》는 세상에 대한 연민과 공감, 경험과 인식이 낳은 소중한 꽃이다. 작가는 세상살이의 풍경과 상처, 존재의 상실과 소멸 등 세상의 안과 밖을 사유하고 있거니와 궁극에 내놓는 것은 희망의 메시지다. ‘그늘에서 피는 꽃’처럼 척박한 환경을 이겨 내고 부디 승리하기를 바라는, 애틋하고 아름다운 희망이다. 삶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안으로 감싸 안는, 따뜻하고 애정 어린 손 길. 이 책이 소중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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