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아기가 있다. 눈은 단추 구멍만 하고 코는 펑퍼짐하게 퍼진 데다 입까지 튀어나왔다. 웬만하면 예쁘다고 해주고 싶은데, 그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아기 엄마 아빠는 예뻐 어쩔 줄을 모른다. 가지가지 장식의 머리띠를 해 주고, 하얀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혀 공주같이 꾸민다. 아기를 쳐다보는 눈에 자랑과 기쁨이 넘친다. 친한 이웃 사람을 만나면 “우리 아기 정말 예쁘죠!” 하며 행복해한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한술 더 뜬다. 어느 날 아기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가 몇 시간 만에 돌아온 두 분, 웃지도 않고 말한다.
“오늘 백화점에서 많은 애들을 보았는데 우리 아기같이 이쁜 애는 못 봤어.”
그 말을 전해 들은 이웃 사람들, 놀라서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 돌아서서 폭소를 터트렸다.
요즈음 내가 그런 식이다.
몇 날, 때로는 몇 달씩 고심해서 한 편의 글을 완성한다. 느낌이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한숨에 술술 잘 읽힌다. 그 글을 들여다보는 나는 행복하다.
첫 독자인 딸에게 자랑스럽게 내놓는다. 아기를 자랑하는 젊은 엄마 같은 심정이다.
“이번에는 엄마가 봐도 잘 쓴 것 같아. 재미있으니까 읽어 봐.”
그러나 딸은 내가 그렇게 끙끙 앓으며 쓴 글을 끝까지 다 읽지도 않고 슬그머니 밀어놓는다. 얼굴에는 ‘도저히 재미없어 못 읽겠어요.’라고 쓰여 있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글을 다시 읽어 본다. 정말 재미가 없다. 자꾸 걸려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도 않는다.
“얘, 그래도 이 표현은 좀 좋지 않니?”
한 마디의 칭찬이라도 들어보려고 나는 비굴해진다.
“아뇨, 너무 상투적이에요.”
“그래도 이렇게 객관적으로 쓴 것은 훌륭하지 않니?
“거리가 적당하지 않아요.”
그리고 좋은 소재를 많이 가지고 그렇게밖에 쓰지 못하는 엄마를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본다.
한때 좋아하던 하루키 글까지 이제는 시시하다는 아이는 말한다.
“엄마, 장 그르니에 글 같은 것 비슷하게라도 한번 써보세요.”
책 읽는 재미로 밤새워 글을 읽던 나는, 이제는 좋은 글 한편 쓰고 싶은 욕망으로 밤을 새운다. 밤을 새운다고 못생긴 아기 같은 내 글이 감동을 주는 글이 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엄마가 자기 아기를 사랑하듯 나도 내 글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수필선집 《얼굴을 마주 보고》 (2024.1 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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