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기획전시>
1.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북서울미술관의 <이건희컬렉션> 기획전시를 관람하였다. 기존 고미술 및 근현대 미술품 중심의 전시와 달리, 근대 서양화와 현대회화 작품으로 구성되어 신선한 감상을 제공하였다. 익히 알려진 작가부터 생소한 작가의 작품까지 다채롭게 전시되어 있으며, 이 중 이인성, 유영국, 강요배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감상평을 정리하고자 한다.
<전시서문>
《그림이라는 별세계: 이건희컬렉션과 함께》는 혼돈의 한국근현대사를 지나며 그림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섰던 이건희컬렉션 작가 8인의 여정을 통해 미술에 있어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매체인 회화에 주목한다. 이번 전시는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과 지역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과 리움미술관의 소장품 36점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비롯한 공사립미술관과 갤러리, 개인 소장의 작품 24점을 함께 구성하여 개별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미술의 한 방법인 회화는 형상을 그리고 색을 쌓는 작가의 행위에 기반한 평면 예술이다. 여러 예술의 영역을 넘나들며 다른 매체와 결합하고 끊임없이 확장되는 동시대 미술의 흐름 속에서 이러한 전통적인 의미의 회화는 이제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듯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회화를 회화이게 만드는 고유의 특징이며 회화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생명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출생 연도가 1912년에서 1952년에 이르는 8인의 작가들에게 미술은 곧 회화였고, 회화는 바로 그리기와 다름없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회화 특유의 성격이 될 수 있는 풍경, 색채, 물성의 개념을 토대로 하여, ‘모습, 정경, 그리고 자연’, ‘색은 살아 움직인다’, ‘물질로 수행을 할 때’라는 세 개의 큰 주제로 구성된다.
전시의 제목인 그림이라는 별세계는 한국의 근대화단을 상징하는 이인성이 “화가의 미의식을 재현시킨 별세계(別世界)”로 회화를 은유한 것에서 차용한 것으로, 작가들이 그림을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궁극의 세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의미를 함축한다. 또한 “그리다”라는 행위와 “그리움”의 감정을 내포한 그림이 가진 깊은 뜻을 표현하기에 회화라는 단어는 부족하다는 참여 작가 강요배의 생각에 착안하여, 그림과 더불어 살고 그림을 통해 호흡했던 8인의 작품세계에 스며든 작가들의 마음과 염원을 들여다볼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해방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6·25전쟁과 남북분단, 그리고 잇따른 전후 혼란기에 이르기까지, 어느 때보다 힘든 시대를 살았던 이 시기 작가들에게 화가로서의 삶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밝은 미래를 떠올리기조차 어려웠던 시절,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들에게 그림은 간섭받지 않을 자유 그 자체이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길이었으며, 내면으로 파고들며 이르고자 했던 꿈과 이상향이기도 했다.
8인의 작가들은 서구의 근현대미술을 직·간접적으로 수용해 양식적 수단으로 삼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나의 정체성과 이야기를 담아낼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세 개의 주제를 넘나들며 아우르는 이들의 작품세계가 보여주는 회화의 넓은 지평을 그림이라는 별세계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현재의 이미지 환경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들의 회화 언어와 메시지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 근대의 채색, 이인성.
근대 미술의 대표적 화가로는 춘곡 고희동을 비롯하여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등이 거론되지만, 이들과 견줄 만한 업적을 남긴 이인성 또한 주목할 만하다. 초기 수채화에서 보여준 뛰어난 기량을 바탕으로 일본 유학 이후 정물, 풍경, 인물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였다. 특히 서구 미술, 특히 후기 인상주의의 영향을 수용하여 서정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하였다.
그의 작품은 조선의 향토성과 사실성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는 동시에, 서정적인 향토성이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비판 또한 제기된다. 이처럼 이인성의 작품은 긍정적 평가와 비판적 시각이 공존하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가을 어느 날>이 특선을, 이듬해에는 <경주의 산곡에서>가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 이는 당시 주류 미술계의 기준과 관전미술에 부합하는 미적 감각을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붉은 토양의 황량함과 대조적으로 푸르고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절제된 표현 속에 깊은 사색에 잠긴 듯한 표정과 외모를 지니고 있다. 대지와 하늘의 대비되는 색감과 인물들의 표현 등을 통해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향토성(鄕土性)과 관전(官展)의 시각에서 인지되는 향토성(鄕土性)이라는 양면적인 측면을 동시에 읽힌다.
3. 추상색채의 선구자, 유영국.
윤형근의 추상은 적묵(寂默)의 고요함을 드러내지만, 유영국은 색채를 통해 추상을 표현한다. 유영국은 점, 선, 면, 형태, 색채 등 기본 조형 요소를 활용하여 강렬한 에너지를 구현하였다. 차가운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일관되게 선보였던 그의 작품 세계는 후기로 갈수록 더욱 단순화되고 견고한 구조를 보이는데, 주로 산을 주제로 하여 암록색조의 배경에 황색의 섬광이 번득이며 미묘한 긴장감을 유발하는 독특한 화면을 구성한다. 대표작으로 〈산〉 등이 있다.
유영국은 앞서 말했듯이 자연의 지속적인 형태를 기반으로 조형을 실험하였다. 이를 통해, 특히 산을 소재로 하여 색감 그리고 점, 선, 면의 형태로 추상세계를 구축하였다. 화면 중앙의 노란색 삼각형은 산의 원형을 상징하는 균형 잡힌 기하학적 색면추상으로, 1960년대 작품 경향을 잘 보여준다.
1970년대 이후에는 직선적 표현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곡선을 활용하여 원경으로 시선을 확장하는 역동적인 표현을 시도하였다. 유영국은 산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 향수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소재라고 누누이 밝혔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작품들을 나란히 보다 보면, 작품 세계의 근본적인 연속성 속에 시대적 변화에 따른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기본적인 조형적 특징은 유사하지만, 작가의 사상과 관념의 변화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색면추상이라는 표현 기법 속에서도 유영국 화가가 언급한 '산'이라는 상징성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4. 자연에 스며든 강요배.
강요배는 민중미술 운동을 선도한 선구자적 작가로서, 사실주의 회화 기법을 통해 역사적 사건과 자연을 심중하게 묘사한다. 특히 자연 풍경을 단순한 대상이 아닌, 주체의 내면을 반영하는 또 하나의 주체로 인식하고 독창적인 시각으로 표현하며, 작품에 다채로운 감정을 녹여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그의 작품 세계는 다양한 감정의 깊이를 화면에 드러난다.
<백련(2006)>은 담채(淡彩)의 농담(濃淡)과 젖은 붓의 거친 터치가 화면에 역동적인 표현을 구현하였다. 근경(近境)에서는 형태의 명확성이 다소 희미하지만, 멀리서 보면 백련(白蓮)의 우아함과 수면의 고요함이 조화롭게 드러난다. 이는 마치 흐르는 물과 시간의 흐름을 연상시키며, 거칠고 부드러운 표현 기법의 조화가 뛰어난 작품이다.
<담일(曇日, 2007)>의 경우, <백련(2006)>과 마찬가지로 근경과 원경에서 바라보는 시각적 경험이 상이하게 느껴진다. <백련(2006)>처럼 멀리에서 보면 고목의 늠름한 자태와 수목에 드리운 달빛의 장엄함이 담담하게 보인다. 아울러,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드리운 가지들이 달빛을 더욱 부각하게 시키는 효과를 창출하며, 가지의 그림자가 하늘의 그림자와 중첩되어 보이는 시각적 효과도 확인할 수 있다.
5. 마무리.
본 전시는 근현대 미술 거장들의 다채로운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건희 컬렉션>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전시 공간과 작품 및 작가 간의 조화가 훌륭하게 이루어져 있으며, 작품들을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한가로이 사색을 즐기기에 참 좋은 전시이자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