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규어 상하이 심포니 홀 (중국, 상하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이 몰려들고 혼돈이 가득한 시대에는 예술이 급격히 발전한다.
혼돈을 자양분 삼아 예술가들은 영감이 샘솟고
자본가들은 그 영감에 기꺼이 돈을 지불해서 자본가들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피냄새와 구린내를 조금이라도 숨겨보려, 혹은 예술적 과시를 위해 투자를 하는 구조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런 공생의 관계가 가장 딱 들어맞는 21세기의 핵심 도시는 누가 뭐래도 상하이였다. 이미 100여 년도 전에 번영을 누릴 만큼 누렸고, 온갖 근대사의 결정적 순간에 상하이는 늘 막강한 존재감을 뽐내왔다. 그렇기에 상하이에는 온갖 휘황찬란하고 (쫌 과한)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고, 세계 최고의 예술가들을 웃돈을 팍팍 얹어주며 모셔오는 일이 경쟁적으로 있어왔다. 지난 몇십 년간 말하기 부끄러웠던 시기를 급하게 덮기려도 하듯이.
당연히 클래식 공연장은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완벽한 전리품이기에 상하이에는 다양한 공연장이 있는데 내가 소개하려는 홀은 나의 전 직장이었던 상하이 심포니 오케스트라기 상주하고 있는 재규어 상하이 심포니 홀(Jaguer Shanghai Symphony Hall)이다. 2014년 개관 당시 이름은 상하이 심포니 홀이었는데 2021년인가에 영국의 자동차 회사 재규어와 강력한 스폰서 계약을 맺으면서 저런 이름이 되었다.
재규어라는 브랜드가 약간 올드하면서도 전통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걸 감안하면 서로에게 win win인 좋은 관계라는 생각. (참고로 영화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가 타는 차는 에쉬튼 마틴이지만 빌런들은 모두 재규어를 타고 나온다. 그 인연으로 홀 명칭 변경 후 첫 공연은 007 음악 콘서트였다. 상임 지휘자 유롱도 재규어 모델..ㅎㅎ)
위에 언급되었듯 휘황찬란한 건물들이 즐비한 상하이에 이 공연장의 외관은 다음과 같다.
실로 심플함의 극치이고 2층 오피스만 갖췄기에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면 여기가 공연장인지도 모를 정도로 소박한 모습이다. 예전에 강남역에 있던 (구) 사랑의 교회 외관과 비슷하다.
여기서부터 상하이인들, 특히 老上海人으로 지칭되는 상하이 토박이들의 취향 같은 걸 드러내는데
“공연장을 화려하게 지어서 사람들 끌어 모으는 건 촌스러운 짓이야”
“프랑스 조계지의 아름다운 경관을 해치는 공연장은 사랑받을 수 없어 “
같은 취향말이다. ㅎㅎ
중국 하면 떠오르는 빨간색과 golden dragon, 어떤 폰트를 써도 구려보이는 중국어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국제적 규격을 최대한 맞추려 한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고 100년 후에도 사랑받는 건축물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게 많이 느껴진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보면
빈야드 형태의 1200석 규모의 콘서트홀과
슈박스 형태의 400석 규모 챔버홀이 있다.
콘서트홀 관객을 1200석으로 제한해서 제작한 이유는
“후기 낭만 교향곡의 가장 이상적인 사운드를 표현하기 위해” 서 라고 한다. 이 또한 상하이 사람들답다.
엘브필하모닉과 월트디즈니 홀 등을 건설한 토요타 야스시의 작품이고, 지하에 설계된 공연장인만큼 지하철의 진동을 피하기 위해 지하임에도 공연장을 공중에 띄워 놓은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력이 총동원되었다는 것도 재밌는 포인트.
독일의 쾰른 필하모닉은 로비가 1층 공연장이 지하인데 공연 중에 로비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걸어 다니면 소리가 다 들리는 개판 공연장인걸 생각하면 꽤나 인상 깊다.
이 곳에서 9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리허설도 공연도 다 저기서 하기 때문에 리드 테스트도 자유롭게 저기서 신나게 하곤 했었다.ㅎㅎ 전용홀은 꿈도 못 꾸는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난 참 복 받은 환경에서 음악활동을 했네.
어쿠스틱은 한마디로 A+급이다.
개인적으로 톱클래스로 생각하는 공연장은 루체른 KKL, 프랑크푸르트 Alte Oper, 베를린 필하모니, 코펜하겐 DR홀(방송국 홀) 이렇게 네 개는 S급으로 따로 빼놓는다면
그 아래 최상급 홀이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가득 차도 답답한 느낌이 없고, 잔향감은 딱 적절하며 (4~5초) 소리가 왜곡되는 일도 없다. 백스테이지 부대시설은 함부르크 엘브필하모니를 제외하면 지구 최강급이고, 빈야드 스타일 공연장이기 때문에 동선을 다양하게 만들어내기도 좋고 관객이 오롯이 음악을 듣기에 최고의 집중력을 선사해 준다.
아 그 흔한 구내식당이나 레스토랑이 없는 것도 마음에 쏙 든다. 클래식 공연장에서 음식물 쓰레기차가 들락날락 거리는 것조차 싫은 상하이 사람들 취향반영.ㅎㅎ 참고로 다른 도시의 중국 공연장엔 구내식당과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이 공연장에서 라벨이나 말러 교향곡, schönberg 구레의 노래, 차이코프스키 등을 연주할 때 정말 황홀한데 후기낭만에 특화시킨 사운드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특히 말러 4번 마지막 화성을 하프와 잉글리쉬 호른이 마무리하고 지휘봉이 끝까지 내려올 때까지의 공기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침묵의 그런 순간을 완벽하게 받아내 주는 공연장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전설적 플루트 주자인 안드레아스 블라우가 상하이에 와서 홀에 관에 길게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는데 마침 그 당시에 함부르크 엘브필하모닉 개관 전에 사운드 테스트를 위해 몇 차례나 NDR 객원 연주를 다녀왔다고 했다. 블라우는 ELPi 홀 사운드를 후하게 쳐주지 않았고 그 차이는 아마도 객석 수 차이에서 온 것 같다고 함께 이야기하기도 했다. 1200석 관객석은 정말 신의 한 수였던 것.
하지만 상하이 심포니 홀의 진짜 보물은 챔버홀이다.
실은 처음엔 챔버홀을 지을 생각이 없었는데 토요타상의 제안으로 (마침 공간도 남아돌고) 건설되었는데 여기의 사운드가 정말 압권. 우리나라에서도 작은 규모 공연장이 많이 지어지고 있는데 제발 상하이 심포니 홀 챔버홀을 참고해 주길 간절히 바라는…
공연장도 3가지 형태로 변환이 가능한데,
가장 좋아하는 건 연주자들이 무대 가운데 올라서고 관객이 빙 둘러앉는 복싱경기장 같은 형태이다. (베를린 피에르 불레즈 saal 생각하면 된다) 사운드의 누락 없고 연주자가 둘러싸여서 실내악을 연주할 수 있는 건 정말 짜릿한 경험^^
상하이 시절이 그리운 건 별로 없는데 저 공연장에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화담앙상블이 연주를 못하는 건 너무 아쉬운 부분. 좋은 날이 오겠지!;)
정리하자면 재규어 상하이 심포니 홀은 디자인과 어쿠스틱, 편의성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성공적으로 잡아낸, 2125년까지 사랑받기를 바라는 훌륭한 공연장이라는 것. 챔버홀은 더 좋다는 것! 기회가 된다면 상하이 디즈니랜드만 가지 말고 콘서트도 보러 가시라는 것! ㅎㅎ
아 노파심에 말하자면 유튜브에 업로드
되는 개판 사운드는 참고하지 마시길. 멋진 공연장을 지은 일본 건축가의 영혼을 갉아먹는 정신 나간 중국 톤마이스터들이 답도 안 나오게 녹음 중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