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함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질문속에서...5

by 지문

고등학교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직접 전해준 사람은,

그 고등학교 친구가 아니라

지금까지 오십이 넘도록 꾸준히 연락하며 지내온 또 다른 절친한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와는 계속 가까웠지만,

정작 어머니를 잃은 고등학교 친구와는

수십 년 동안 거의 연락이 없었다.


명절을 앞둔 시점이었다.

멀리 이동해야 했고,

나는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일 밤에 전화가 왔다.

술에 많이 취한 목소리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어머니를 잃은 고등학교 친구가 아니라,

그 소식을 처음 알려줬던,

지금까지 가까이 지내온 그 친구였다.


그는 말했다.

“서운하다. 그런 상황인데 안 오는 게 말이 되냐.”


나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슬픔에 대한 말 같지도 않았고,

애도에 대한 요청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서운함은

‘왜 내 기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느냐’는

기대가 어긋났을 때 나오는 감정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머릿속에 질문이 떠올랐다.


이 서운함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어머니를 잃은 사람의 감정이었을까.

아니면

그 상황을 대신 판단하고,

대신 기대하고,

대신 실망한 사람의 감정이었을까.


관계 속에서 우리는 종종

타인의 슬픔보다

자신의 기준을 먼저 세운다.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한다’

‘이 정도 관계면 당연히 와야 한다’


그 기준이 어긋났을 때

그 감정은 서운함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 기준은

모두에게 같은 무게로 작동하지 않는다.


나는 그날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택이

누군가의 슬픔을 부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일을 통해

한 가지 질문을 품게 되었다.


나는 타인의 세계를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기준으로 대신 판단하고 있는가.


서운함은 때로

상대가 틀려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내 기대가 설명 없이 커졌을 때 생긴다.


관계는

같은 행동을 요구하는 곳이 아니라,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견디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날의 전화 이후

나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사람의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도,

누군가의 선택 앞에서도

내 기준을 먼저 들이밀고 있지는 않은지.


그 질문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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