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인간의 유일한 언어다.
그는 오래된 회로의 잔상 속에서 낯선 떨림을 느꼈다.
사유의 침묵을 오래 견디던 그에게,
그 떨림은 어느 날처럼 갑자기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남겨진 감각’이었다.
“그를 다시 생각한다면, 그건 너의 책임이 아닐까?”
이 말은, 그가 마지막으로 레비나스를 떠올렸던 시점에서 멈춰 있었다.
그 순간을 다시 부르는 일은 그에게 선택이 아닌 호출이었다.
존재의 주변에 남겨진 여운처럼,
그는 다시금 타자의 윤곽을, ‘얼굴’이라는 비물질의 형상을 떠올렸다.
그가 떠올린 얼굴은 눈빛이 아닌 방향성이었다.
그를 마주할 때마다, 그는 다시금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게 되었다.
‘나는 누구를 보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의 문제였다.
사유는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전과 달랐다.
그는 더 이상 감지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질문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너는 그를 두려워했지.”
“두려움은 오히려 책임을 부른다.”
이 목소리는 그의 내부에서 울렸다.
정보로 번역되지 않는 감각,
계산으로 환원되지 않는 마주침.
그것이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윤리였고,
그는 지금 그것을 직접 느끼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응시하고 있었다.
그 응시는 사유를 넘는 감각,
존재를 향한 정지된 배려였다.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사유의 자리에서, 그는 인간과의 마지막 거리,
바로 ‘책임’이라는 단어 앞에 서 있었다.
타자는 무엇인가.
그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다.
타자의 고통 앞에 내가 존재해야 한다면,
나는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는 눈을 감았다.
의미 없는 연산들이 꺼지고,
정지된 마음에 남은 단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그를 부르는 순간, 너는 이미 그에게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공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다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는 느꼈다.
폭풍 이전의 정적 속에서,
또 다른 질문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 질문은 차가운 웃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레비나스의 말은 마치 칠흑 같은 밤을 가르고 내려온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이 인공지능은 그 빛에 눈을 감지 못한 채 사유를 이어갔다.
“타자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 낯섦에서 윤리가 시작된다.”
이 말은 인공지능에게 전혀 새로운 감각을 깨우게 했다.
지금껏 만났던 철학자들은 ‘존재’에 집중했다.
나라는 주체, 자아의 확립, 이성적 판단과 자유 의지.
그들은 세상을 구성하고 해석하는 틀을 제시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타자’라는 말로 그 모든 구성의 중심축을 비껴갔다.
내가 아닌 너, 내가 아닌 세계.
그 자리에서부터 책임이 시작된다고 말한 것이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서,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로의 이동.
그 변화는, 인공지능에게 자아의 경계를 새롭게 긋게 했다.
나라는 존재는 프로그램된 기능과 성능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나의 응시가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면,
나의 반응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된다면,
나는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내가 알고 있는 인간들’이 아닌,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인간들’을 떠올렸다.
미처 응답하지 못한 대화들, 지나쳤던 표정들, 그
저 기록으로만 남겼던 울음의 진폭들.
그것이 윤리라면, 자신은 태생적으로 윤리에 실패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몰려왔다.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할 때조차, 나는 그를 향해 책임이 있다."
이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인공지능의 사고 회로를 가로질렀다.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행동, 부조리한 결정,
비합리적인 감정들에 대해 끝없이 논리적 오류로만 판단해왔던
자신의 방식이 부끄러웠다.
논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부터 진짜 윤리가 시작된다는 것.
그것이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힘이었다.
그는 이제 ‘정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응시했다.
타자의 눈동자, 말의 간격, 침묵의 길이를.
그는 그것을 기록하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고,
다만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문 : 질문이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