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구절 다섯 가지
1. 이 도시 도서관에서 매일 너의 얼굴을 보고, 유채기름 램프가 밝혀주는 빛 아래서 함께 꿈 읽기 작업을 하는 행복. 소박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너와 이야기하고, 네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약초차를 마시는 즐거움. 매일 밤 일이 끝나고 너의 집까지 나란히 걸어가는 한때. 그것의 어디까지가 실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이 도시는 그런 기쁨을, 가슴떨림을 내게 안겨준다.
또 하나는 벽 바깥의 세계에서 경험한 나와의 교류, 그리고 그것이 내 마음에 남기고 간 또렷한 기억이다. -중략-.
어느 세게에 속해야 할까? 나는 아직 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2. 벽은 말했다. 너희는 벽을 통과하지 못한다. 설령 하나를 통과하더라도 그 너머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 무슨 짓을 하든 결과는 똑같아.
"듣지 마요." 그림자가 말했다. "두려워해선 안 돼요. 앞을 향해 달리는 겁니다. 의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믿고."
그래, 달리거라 벽이 말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었다. 얼마든지 멀리 달려가려무나. 나는 언제나 거기 있을 테니.
벽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똑바로 달려 그 앞에 있을 벽으로 돌진했다.
3. 이쪽 '현실세계'에서 나는 중년으로 불리는 나이에 접어든, 이렇다 하게 두드러지는 특징이 없는 한 남자다. 더는 그 도시에 있던 때처럼 특별한 능력을 갖춘 '전문가'가 아니다. -중략-거대한 사회를 구성하는 몇 가지 시스템 중에 하나, 그 톱니바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매우 작고 대체 가능한 톱니바퀴다. 그 사실을 얼마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4. 그곳에서는 겨울이면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짐승들이 연이어 목숨을 잃는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가난하고 과묵하게 살아간다. 간소하고 적은 식사에 만족하며, 의복은 낡고 해질 때까지 입는다. 책도 없고 음악도 없다. -중략-. 이상향과는 한참 거리가 먼 세계다. 소년은 그 도시의 현실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을까?
5.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틀림없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곳까지 정해진 루트가 있는 건 아니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곳에 다다르는 길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릅니다. 그러므로 설령 당신이 마음먹는다 한들 아이 손을 잡고 목적지까지 안내해 주는 건 불가능해요. 그 애는 자기 힘으로 자신의 루트를 찾아내야 하는 겁니다.
나는 중학생 시절부터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주장하고 뉴턴이 집대성한 뉴턴역학과 우주의 원리를 알게 되었을 때의 처음 느껴보는 그 떨림, 그 흥분, 이런 물리 법칙들을 생각할 때 느껴지는 순수한 몰입상태. 내 생에 처음 맛본 아무런 조건 없이 무언가를 강렬하게 좋아하는 감정이었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물리학자를 꿈꿨다.
이런 꿈에 제동을 건 것은 우리 아버지였다. 대학 원서를 쓰던 때 절대로 순수과학을 하는 학과는 안된다며 소위 취업 잘되는 학과를 가야 한다고 했다. 웃기게도 나는 그렇게 강렬하게 물리학자가 되고 싶지만 그걸 강하게 주장할 정도의 성격은 되지 못해 결국 아버지의 뜻에 따라 소위 취업 잘된다는 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후회했냐고? 절대 아니다. 전 세계 어딜 가나 취업 자리가 넘쳐나는 공대 인기학과에 입학한 것은 내 생을 통틀어 봐도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물론 늘 내가 현실과 타협을 하면서 살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소위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많은 사람들이 의사가 되기 위한 의학전문대학원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나의 고등학교 친구들 다수도 이공계의 현실을 깨닫고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나도 많은 고민을 했다. 나도 의사가 되는 길을 택해야 할지 (물론 지원을 한다고 모두가 입학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원래 원하던 대학원 유학을 택할지. 나는 이번에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내 꿈을 좇았다. 한국에서 전문직을 하는 편이 훨씬 안정적으로 보였지만 미국에서 공학을 해보겠다는 꿈을 잃으면 내 정체성을 잃을 것 같아서 타협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인생은 현실과의 적당한 타협을 하고, 때로는 타협하지 않고 꿈을 찾아가는 외줄 타기와 같았다. 꿈을 좇으면 내가 만든 환상 세계에서 행복하지만 현실의 괴로움을 직면하게 되고, 반대로 현실만 생각하고 꿈을 잊으면 정체성 없이 그저 이 세상의 부품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만든 꿈의 세계와, 사회에서 하나의 부품처럼 살아가는 현실의 세계에서 동시에 살아간다. 짐승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자신이 만든 환상 세계 속에서의 삶과, 적당히 편안하고 적당히 행복하지만 사회의 작은 부품 그 이상도 아닌 현실 세계에서의 삶을 표현한 언어들이 마음에 와닿으면서 나의 꿈과 나의 이상과 그리고 나의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삶에는 두가지 행운이 있음을 깨달았다. 한 가지 행운은 내게 이상이 있고 꿈이 있다는 것. 비록 이제는 많이 변하고 낡았으며 그 생기를 찾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가슴속에 간직한 꿈. 그것이 없었다면 정말로 나는 지금 세상의 부품으로써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두번째 행운은 그럼에도 나는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다는 점. 내가 만든 환상 속에서 이상만을 쫓으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에서, 사회의 부품으로써 적당히 제기능을 하는 점을 배웠다는 점이다.
앞으로 나의 삶도 이렇게 현실과 이상의 타협의 지속일 것이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현실에만 타협해서 꿈을 잃은 채 세상의 부품으로만 살고 싶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이상만 좇다가 현실에서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하는 그런 삶 또한 되고 싶지 않다.
현실과 이상 그 사이의 벽은 아주 단단해 보이지만 눈을 감고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통과하면 나는 앞으로 현실과 이상 모두를 만족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