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무렵, 엄마의 손을 잡고 입시학원에 들어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는 특목고와 자사고가 한창 주목받던 시기였다. 주변의 분위기에 이끌려 나 역시 그 흐름 속에 있었다. 여러 위태위태했던 시간들이 있었지만, 다행히 많은 도움 속에서 중·고교 시절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지금 와서 특목고의 어려움이나 우리 학교가 얼마나 좋았는지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할 나이도 지났다. 다만 인생의 결정적 시기라 불리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보냈던 것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흔적으로 남았는지는 돌아보게 된다.
특목고를 준비면서 그리고 다니면서 나는 교과서보다 훨씬 난도가 높은 문제들을 풀었다. 복잡한 심화 문제와 경시대회 문제를 붙잡고 오래 고민하며 원리를 깊이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런 경험은 나중에 이공계에서 공부하고 일할 때 도움이 됐다.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거나 엔지니어로서 복잡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할 때, 그때 길러진 사고 습관이 힘을 발휘했다. 나는 아직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많지만, 엔지니어로서 나의 장점을 꼽는다면 기술의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복잡한 문제를 깊이 파고드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쌓아온 사고 습관이 결국 직업인으로서 나의 일하는 방식까지 만든 셈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경험이 밝은 면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며 그 교육이 남긴 그림자를 자주 느꼈다. 한때 로봇 산업에 매료되어 메카트로닉스 융합 엔지니어를 꿈꾼 적이 있다. 기계, 전기, 컴퓨터를 함께 다루는 분야였고 모두 흥미로운 영역이었다. 그러나 금세 그 꿈을 접었다.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균형을 잡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 개인의 기질 영향이 크겠지만, 특목고에서의 경쟁 중심의 교육 환경이 남긴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특목고는 경쟁이 치열해 어떤 과목은 때때로 전략적 포기를 하기도 했다. 각 과목별로 상위권이 워낙 단단했기에 잘하는 과목에 집중하는 것이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그런 과목별 선택과 집중 전략은 현실적이었지만 동시에 두루두루 잘 알고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특목고 대신 일반고에 갔다면 어땠을까. 내신 관리를 중심으로 고르게 공부하며 균형 잡힌 사고를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쯤 로봇 분야에서 융합형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데이터 엔지니어와 같은 분야에도 관심이 있었다.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과정은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직접 강의를 듣고 진로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길을 가지는 않았다. 정답이 있는 문제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내 성향 때문이다. 인공지능 분야는 정답이 계속 변하는 세계였고, 그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 이런 성향도 어릴 적 교육이 남긴 흔적일 것이다.
또 이런 상상도 해본다. 어린 시절, 해외에서 지낼 수도 있었던 시기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나에게 그런 선택지가 주어진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만약 그때 해외에서 국제학교에 다니며 IB처럼 에세이·발표·프로젝트 중심의 수업을 경험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완벽을 추구하기보다 일단 시도해 보는 태도를 더 자연스럽게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쯤 AI나 머신러닝처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야에 더 가까이 가 있었을 수도 있다.
결국 이런 생각의 끝은 하나의 결론으로 닿는다. 교육, 특히 중·고등학교 시절의 교육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힘을 가진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그 시절 교육의 장점은 살리고 한계는 줄이며 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도 문득 하게 되었다. “그 교육 제도가 한 나라의 산업 구조에도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닐까?”
왜 한국과 일부 아시아 국가는 반도체나 배터리 같은 제조업에 강할까. 왜 서구권은 소프트웨어와 AI를 주도할까. 왜 로봇 산업은 뚜렷한 강자가 없이 여전히 경쟁 중일까. 물론 산업정책이나 리더의 역량도 작용하지만, 교육 구조의 영향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한국의 수학·과학 교육은 철저히 단계적이다. 수 1을 못하면 수 2를 못하고 수 2를 못하면 미분과 적분을 풀지 못한다. 기초가 없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는 구조 속에서 논리력과 계산력을 반복 훈련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엔지니어는 체계적 사고와 정확한 설계에 강점을 가진다.
반면 서구의 프로젝트 기반 교육은 문제를 스스로 정의하고 해결하며, 실패를 통해 배우는 능력을 길러준다. 이런 습관이 프로그래밍 등 창의적 문제 해결력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로봇 산업은 두 방식의 중간에 있다. 반도체와 AI, 제조업과 소프트웨어가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뚜렷한 강자가 없는지도 모른다. 두 교육 방식이 균형 있게 어우러질 때 발전할 수 있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외국에 오래 살다 보니 다양한 교육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완전한 교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교육은 기초가 약하지만 창의적이고, 또 어떤 교육은 체계적이지만 유연하지 않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보다 자신에게 맞는 교육을 만나는 행운과, 그리고 그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는 스스로의 역량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육은 어떤 모습일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좋은 제도는 다 가져왔지만 그 바탕이 되는 철학은 가져오지 않았다. 학교 내신평가는 일본식, 입학사정관제와 세특은 미국식, 심화 논술은 영국식, 동아리 평가는 IB 식이다. 다양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평가 방식만 다양해졌을 뿐 교육의 내용은 다 똑같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비슷한 공부를 하면서 결과만 불평등해졌고, 사교육은 더 활개를 친다.
이는 완전한 교육이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어떤 제도에도 단점이 있지만 우리 사회는 유독 교육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그 한계를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예를 들어 수능으로 평가 체계를 일원화하자고 하면 한 번의 시험에 인생이 결정된다며 비판이 따른다. 내신 중심으로 평가하자고 하면 학교가 성적으로 학생을 줄 세운다고 하고, 수행평가와 정성 평가를 늘리면 공정성 논란이 불거진다. 입학사정관제를 시행하면 금수저 전형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과목 선택제를 도입하면 어린 학생에게 이른 선택을 강요한다고 비난한다. 어떤 철학을 선택해도 비판은 따라온다. 그래서 지금의 교육제도는 수능, 내신, 수행평가, 논술, 비교과까지 모두 요구하는 구조가 되어 버렸다.
이 제도는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에게 고통스럽다. 학생들은 각자의 성향이나 진로와 맞지 않는 교육을 일률적으로 받아야 하고, 다양성을 내세웠지만 오히려 모두가 똑같은 공부와 활동을 하게 되는 역설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차라리 고등학교 진학 전에 교육 트랙을 나누고, 학생이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예를 들어 시험 중심의 체계적인 학습을 원하는 학생은 수능 트랙을, 중간, 기말고사를 통해 꾸준함과 성실함을 보여주고 싶은 학생은 내신 트랙을, 특정 과목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은 학생은 심화 트랙을, 다양한 대회 준비와 활동을 해보고 싶은 학생은 포트폴리오 트랙을, 에세이와 발표와 같은 스스로 탐구하는 공부를 하고 정성 평가를 받고 싶은 학생은 정성 평가 트랙을 선택한다. 각 트랙은 단순히 평가 방식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철학과 교과과정, 수업 방식 모든 게 달라야 한다. 대학은 어떤 트랙에서 어떤 전공으로 몇 명을 선발할지 입시가 치러지기 몇 년 전에 공시하고, 각 트랙 내에서는 동일한 기준으로 학생을 평가하면 공정성 논란도 줄어들지 않을까.
교사들도 자신의 성향에 맞는 역할을 선택할 수 있다. 수업과 시험 중심으로 일하고 싶은 교사는 수능 트랙을, 학생의 성장을 기록하며 지도하고 싶은 교사는 포트폴리오 트랙을 맡을 수 있다. 지금처럼 생활기록부와 시험, 수행평가, 그리고 강의까지 모두 책임져야 하는 만능 교사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교육 전문가가 아니다. 다만 한국의 교육을 거쳐온 사람으로서 품어본 상상에 불과하다. 전문가의 눈에는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제도는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학생도, 교사도, 학부모도 모두 지쳐 있다. 이렇게 완전히 동일한 교육 과정을 유지한다면 차라리 수능만으로 평가받는 편이 합리적인 방식이다.
우리는 이제 다른 출발점에 서 보자고 말하고 싶다. 완벽한 교육 제도도, 완벽한 학교도 없다. 모든 학생과 부모가 동의할 수 있는 제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을 찾기보다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다양한 교육의 길을 마련해 학생들과 부모에게 선택권을 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모두를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드는 첫걸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