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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을 잃은 사회

by 공책

어릴 적부터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시험 위주의 교육은 문제다. 아이들의 창의성을 길러줘야 한다. 수능 같은 시험에 모든 학생이 매달리게 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한국 교육은 이래서 문제다. 이런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자라왔고, 그런 담론에 휩쓸린 것인지 각종 새로운 입시 제도들이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낼 무렵 하나둘 제도권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수시제도가 제도권 안에 들어왔고, 나 역시 그 제도의 혜택을 받아 대학에 갔다. 수시로 대학에 온 친구들 정시로 대학에 온 친구들을 대학에서 모두 만날 수 있었는데 정확한 비율이 어땠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쉽게도, 아니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나는 수능 공부를 제대로 해본 경험 없이 대학에 갔다. 학교에서 보는 수행평가나 중간, 기말고사 등은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지만, 수능처럼 사회 전체가 함께 치르는 큰 시험은 진지하게 공부해 본 적이 없다. 아마 지금 청년 세대 중 많은 이들이 내신, 논술, 학종 등을 통해 대학에 가며 비슷한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으로 오고 나서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악처럼 여겨졌던 시험이, 오히려 여기에서는 공정하고 중요한 잣대로 활용되고 있었다.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미국 산업계의 엔지니어 세계에서는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는 커리어를 이어가기 어렵다. 미국의 이공계 박사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관문 중에 하나는 박사 자격시험, 일명 ‘퀄 시험’이다. 학교마다, 전공마다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전공과목들을 중심으로 출제되는 이 시험에서 기준에 미달하면, 아무리 논문을 잘 써도, 연구를 성실히 해도 탈락이다. 기회는 몇 번뿐이며, 결국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아무리 창의적이라도 기본기를 증명하지 못하면 인정받지 못한다.


박사를 마친 후에도 시험은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부터가 진짜 시험의 시작이다. 미국에서 엔지니어로 취업하거나 이직하려면 대부분의 기업에서 실제 업무와 밀접한 문제를 해결하는 ‘테크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 지원자는 마치 전공 시험을 보듯 실시간으로 문제를 풀거나 코드를 작성하며, 그 과정에서 면접관과 사고 과정을 토론한다. 대학 이름이나 논문 실적보다, 이 면접에서 전공 지식의 탄탄함과 문제 해결의 정밀함이 합격을 좌우한다.


전공 시험은 통과 해야 하는 절차를 넘어 직업인으로서 생존 조건에 더 가깝다. 마치 주목받는 일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연예인을 지속하기 어렵고, 아이들을 귀찮아하는 사람이 교사로 오래 버티기 어려운 것처럼, 지속적인 학습과 전공 시험 과정을 즐기지 못한다면 미국의 엔지니어로 경력을 이어가는 일도 쉽지 않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기업 입장에서 이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전국, 아니 전 세계에서 모여드는 수많은 지원자들은 각기 다른 교육과정을 거치고, 서로 다른 기준의 성적표를 지닌다. 다시 말해, 각자의 학교 성적만으로는 실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공통의 기준을 세우기 어렵다. 경력자라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력서에 이전 직장과 직무가 적혀 있더라도, 그곳에서 실제로 탁월한 기여를 하며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는지, 아니면 단지 운이 좋아 자리를 유지했는지는 이력서만으로는 판단하기 힘들다. 더구나 이전 직장에 직접 연락해 평판을 묻는 일은 미국에서 법적 분쟁이 일어날 소지가 크다. 결국 기업이 의지할 수 있는 가장 공정하고 실질적인 방법은 전공 분야의 시험을 통해 지원자의 실력을 검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나에게 크게 두 가지 영향을 주었다. 첫째, 시험이 있다는 사실이 꾸준히 발전하려는 동기를 만들어줬다. 어떤 회사에 가든, 어떤 이직을 하든 시험을 통과해야 하니, 자연스럽게 실력을 유지하고 공부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 내가 노력하면 결과로 증명할 수 있고, 그 기준이 명확하다는 점은 큰 동기부여가 됐다. 둘째, 시험은 나에게 또 다른 희망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이력서에 적힌 스펙이 부족해도, 테크 면접을 잘 보면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믿고 노력해 왔다. 그건 내 실력을 스스로 증명할 마지막이자 가장 공정한 기회였다. 이 경험은 역설적으로 내가 한국에서 느끼지 못했던 공정한 시험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했다.




한국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평가와 불투명한 기준들 속에서 학생들이 지쳐가고 있다. 시험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한국은 이제 '시험 거부 공화국'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시험이 많아서 피로한 게 아니라, 기준이 모호한 평가가 너무 많기 때문에 지친다. 수행평가, 내신, 태도평가, 생활기록부 모두 평가 대상이다. 모든 행동이 점수로 환산되니 공부의 본질보다 평가관리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


한국이 얼마나 ‘시험 거부 공화국’이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바로 수학·과학 올림피아드 성과의 대입 반영 금지 조치다. 현재의 제도에서는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받은 학생조차, 학교 생활기록부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기 어렵다. 내가 전 세계의 입시제도를 모두 검토해 본 것은 아니지만, 국제적인 최고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토록 제도적으로 무력화한 사례를 한국 외에 떠올리긴 어렵다.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하더라도, 학교 내부 평가인 생활기록부 외의 어떤 시험도 반영되지 않도록 설계된 현재의 제도는 시험 자체에 대한 맹목적인 거부감이 제도에 반영된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시험이 지나치게 많다고 말하지만, 사실 진짜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시험은 줄었고 평가는 훨씬 자주 일어난다. 학생들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자주, 더 세밀하게 관찰당한다. 시험은 줄었지만, 평가는 늘었다. 학생들은 주체적 학습자라기보다 상시 평가받는 피험자에 가까워졌다. 그 결과 학생들도 학부모들도 피로하다. 기준 없이 이루어지는 잦은 평가는 사교육비를 더 증가시켰다.


사회 또한 마찬가지다. 명확한 시험이 사라지고 스펙 경쟁이 자리 잡았다. 스펙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정보력과 환경의 산물에 더 가깝다. 시험의 자리를 평가의 과잉과 기준의 부재가 채웠다. 우리는 더 자주 심판받지만 어떤 판정도 신뢰하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시험이 낡았다고 말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주장들은 되려 현재 한국 사회가 다가오는 기술 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정작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미국 산업계는 철저하게 시험을 본다. 박사 자격시험과 테크 면접, 모두 시험이다. 시험은 낡은 제도가 아니라, 자신들이 뽑고 싶은 인재를 검증할 수 있는 가장 명료한 제도로 자리 잡고 있다.


진짜 낡은 것은 시험을 없애면 창의성이 생길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적인 사고방식이다.


한국 사회가 시험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과거 입시 제도가 시험을 통해 학생들을 줄 세우고 서열화했던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 문제의 본질은 시험 그 자체가 아니라, 서열을 전제로 설계된 사회 구조에 있었다. 한국 사회는 사람을 순서대로 줄 세워야만 작동하는 구조를 유지한 채, 그 부작용의 책임을 시험 제도에게 돌려왔다.


그러나 기준 없는 경쟁은 어떤 시험보다도 더 불공정하다. 기준이 사라진 자리는 결국 노력과 실력 대신 환경과 운이 결과를 좌우하는 공간이 된다. 시험이 불공정하다면, 시험을 없앨 것이 아니라 그 질을 높이고 형태를 다양화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시험의 폐지가 아니라 공정성을 높이는 개혁이었다. 수능 제도가 낡았다면, 새로운 형태의 공정한 시험으로 개편했어야 한다. 대학들이 수능 점수 이외의 평가 방식을 원했다면, 대학별 시험을 허용하되 문항과 채점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해 한국의 고교 교육과정으로 풀 수 있는 시험이라는 것만 밝히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런 개선 대신, 모두가 기준을 공유할 수 있는 시험이라는 기준 자체를 무력화하는 쪽을 택했다.


문제의 핵심은 시험이 사람을 줄 세운다는 데 있지 않다. 사람을 줄 세워야만 작동하는 사회 구조, 바로 그것이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한 근본적인 문제다. 결국 시험이 있든, 없든, 이 사회에서는 줄이 세워진다. 그렇게 여전히 줄 세우는 사회 속에서, 하지만 명확한 평가 기준이 사라진 사회에서 청년 세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냉소와 무기력에 갇히고, 그 무기력은 신뢰를 갉아먹어 사회 전체의 동력을 잃게 만든다.




예전에 한 정치인의 교육에 관한 발언을 본 적이 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다. 여론이 원한다고 해서 그 정책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수시보다 시험 중심 제도를 원하는 국민 여론이 훨씬 높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반박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미 공정한 시험이 사라진 학교에서 학생들의 학력은 각종 지표에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사회 전체의 신뢰는 바닥을 치고 있다. 여론조사를 보면 공정한 시험을 원하는 국민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높다. 이런 상황에서 백년지대계를 말하며 여론보다 특정 이념을 교육에 밀어 넣겠다는 태도는, 결국 백년짜리 비전이 아니라 백년짜리 독단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특정 정치인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한국의 교육정책은 오랫동안 어떤 정치 세력이 권력을 가지더라도 늘 이념과 신념의 실험장처럼 작동해 왔다. 경제나 복지 정책처럼 즉각적인 효과가 드러나지 않는 탓에, 교육정책은 현실의 경험적 평가에 귀를 닫은 채 이념적 확신이나 이상주의에 기대어 추진되는 경우가 많았다. 겉으로는 ‘미래’, ‘창의성’, ‘다양성’ 같은 듣기 좋은 말들로 포장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논리와 근거 없는 믿음이 자리했다. 시험을 줄이면 창의성이 커질 것’이라는 주장도 결국 정책이라기보다 신앙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이념을 덧씌운 새로운 정책이 아니라, 그동안 시행된 정책이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다.


이제 더 이상 “시험을 없애야 창의력과 다양성이 자란다”는 근거 없는 주장은 통할 수가 없다. 시험을 대신해 도입된 제도들이 실제로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그 결과는 우리 현실 앞에 펼쳐져 있다.


수시 제도가 도입된 지는 25년, 본격적으로 확대된 지도 20년 가까이 되었다. 우리가 마주하는 청년들이나 교육에 관한 뉴스는 그 제도의 도입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 청년들이 각자의 개성과 창의성을 살려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소식보다는, 특기나 적성과 무관하게 의사가 되기 위한 경쟁이 한층 더 격화되고 있다는 뉴스들이 들린다. 이공계 청년들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해 줄 곳을 찾아 더 많이 외국으로 떠나며, 일부 청년들은 집단적인 무기력에 빠져 있다는 소식들뿐이다. 사교육비는 더 늘어나고, 출산율은 극단적으로 낮다.




기준이 없이는 다양성도, 창의성도 뿌리내릴 수 없다. 공정한 능력 검증의 토대 위에서만 다양성은 진정으로 존중될 수 있다. 공정한 기준이 결여된 다양성은 겉보기의 포용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내면의 존중은 자리할 곳을 잃는다. 창의성이란 기존의 기준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사고의 자유다. 따라서 기준이 사라진 곳에서는 창의성 또한 시작되지 않는다.


기준을 잃은 사회는 신뢰를 잃고, 신뢰를 잃은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운다. 그렇게 사람들은 끊임없이 민원을 제기하고, 소송을 벌이며, 자신의 몫을 지키기 위해 싸우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이들은 성실하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결국, 우리 모두는 사회를 움직이던 가장 순수하면서도 강했던 그 에너지, 노력하면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노력의 도덕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공동체는 동력은 꺼지고 있다.


‘시험을 없애면 창의력이 커진다’는 근거 없는 믿음은 사회적 신뢰와 미래로 나아갈 엔진을 희생시키는 위험한 거래였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지금 그 위험한 거래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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