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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인 Aug 23. 2024

[단편 소설] 용과 뼈와 파도

용골(龍骨):선박 바닥의 중앙을 떠받치는 길고 큰 재목

       

 태업이다.    


 태업이다.

 태업이야, 태업.    

 

 파도는 바다의 일이라면서.

 순 엉터리.     


 그녀는 일주일 전 헌책방에서 그러쥐어본 줄금 가득한 소설을 떠올렸다.     


 어떤 이의 손을 탔기에 이리도 상처투성이가 되었을까.


 어쩌다가 이 좁디좁은 헌책방으로까지 흘러들어온 것일까.     


 둔한 사람. 무책임한 사람. 매정한 사람. 손에 그러쥔 것을 쉽게 놓는 사람.     


 그러한 연약한 생각들을 입맛대로 그려내고 그녀는 낡아빠진 책 표지를 들여다봤었다.    

 

 바닷바람에 부드러운 머리칼이 마음껏 춤추게 내버려 둔 여자의 상반신 뒤로 바위 두어 개가 박힌 바다가 저 멀리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파도.


 꽃처럼 피어난 파도가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바다 위에 만개했다.   

  

 바다에도 꽃이 피네.     


 꽃밭을 오가며 춤추는 꿀벌의 연약한 날갯짓처럼 그녀가 중얼거렸다.  

        




 비탈 위 동백나무 숲에서 안개가 비처럼 쏟아졌다.    

 

 땅과 맞닿은 굵직한 안개는 한곳에 고이지 않고 삽시간에 공기 중으로 흩어져 주위를 물들였다.  

   

 가슴 한편으로 와락 뛰어든 슬픔처럼.           




 

 책을 구매하거나 읽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제목에 이끌려 무심코 책꽂이에서 꺼내본 참이었다.     


 단지 책이 간직하고 있을 무게감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렇게 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실물의 무게를 감지했다.


 호기심에 한번 펼쳐볼 법도 하건만, 책의 제목과 표지만 한참 응시하고는 황망히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안 그래도 책은 이미 상할 대로 상했다.     


 섬세하지 못한 손길에 혹여 더 찢기고 다칠까, 그녀의 손놀림은 필요 이상으로 재빠르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얼굴엔 무참한 표정 하나가 휑뎅그렁하게 박혀있었다.  


        




 열심히 좀 해봐.     


 그녀는 창밖의 바다를 보며 속삭인다. 바다의 귀에 대고 말하듯 소곤소곤. 얼마간의 다정함을 담아.     


 그녀의 애석한 응원은 좀처럼 닿질 않는지 바다는 꿈틀대는 법 없이 못 박힌 듯 잔잔하다.    


      



 헌책방에서 나온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파도로 가득했다.  

   

 머릿속 파도는 철썩거리며 머리통을 울렸고, 펑― 펑― 폭음이 진동하듯 온몸을 때렸다.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등허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이내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골목에 숨어들 틈도 없이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전봇대를 부여잡고 속을 게워냈다. 

    

 이렇다 할 음식물 없이 불투명한 허연 액체만 쏟아져 나왔다. 씁쓰레한 악취가 입안에 감돌았다.    


      



 바다내음이 풍겼으면 어땠을까, 하고 그녀는 아쉬워했다.  

   

 파도를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받아내면 어떨까, 하고 그녀는 기대했다.    

 

 바다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싶었다.  

   

 그녀는 바다로 떠났다.


 그녀가 생각한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지 않았다.     


 끝에 대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최소한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흘려보낸 33년의 인생과 최근 한 달 동안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그 둘이 지닌 가치에 대해 그녀는 헤아려봤다.     


 기울어진 천칭. 균형이 어긋난 날개. 무너진 천장. 휘어진 기둥. 말라버린 뿌리. 대파된 용골.     


 생각이 거기에 그치자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다시 파도가 쳤다.


 파도가 머리를 때렸다.          





 버스에 오른 그녀는 곧장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어김없이 파도가 피어나 춤을 췄다.    

 

 일렁이는 바다 위 돛배. 춤을 추자. 어서 가자.


 바다의 중심으로. 파도가 시작되는 곳으로.     


 깊은 잠에서 깬 그녀는 하선하는 선원처럼 비치적비치적 버스에서 내렸다. 바다내음이 코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바다. 파도의 고향.     


 그녀는 큰길을 따라 내처 걸었다.


 반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눈으로 짙은 푸른빛이 달려들었다.   

  

 바다가 시작되고 파도가 끝나는 곳.     


 무언가를 시작하고 끝내기에 더없이 적절한 장소.          





 게으른 바다.


 심술이 났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이부자리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언제나처럼 화장실로 가 거울을 들여다봤다.


 한 달이 넘도록 화장을 안 한 덕인지 피부는 한결 깨끗해진 것 같았다.     


 반면, 빨갛게 실금이 가있는 눈동자와 멍이 든 것처럼 시퍼런 눈 밑 때문에 병색이 완연했다.  

   

 ―차라리 병원을 가. 혼자 그게 뭐야. 내 동기가 진료하는 곳으로 소개도 시켜줬잖아. 도대체 뭐가 문제야?     


 비난과 염오.


 남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모든 문장에 배어있던 것이었다.     


 문제는 뭘까.     


 문제.     


 그녀는 그렇게 속삭였다.


 거울에 비친 귀에 대고. 소곤소곤.

 아무도 듣지 못하게.          





 고양이가 울었다.


 눈향나무 이파리가 너울댔다.     


 그녀는 자신의 발부리를 내려다봤다. 손을 오므려 쥐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무엇도 밟히지 않았다.     





 ―어디서 왔수?     


 하얗게 머리에 서리가 내린 노파가 물었다.


 몇 년 후면 완전히 ㄱ자로 꺾어질 듯 허리가 위태위태해 보였다.  

   

 ……왜요.     


 그녀는 겁먹은 들짐승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면서도 잔뜩 날을 세워 되물었다.   

  

 ―왜? 일본에서 왔다고? 지금 지가 왜놈이라고 자랑하는 거여?  

   

 ―여자니께 왜년이지, 왜년.     


 나란히 서있던 또 다른 노파가 낄낄대며 끼어들었다.


 올곧게 뻗은 허리와 그을린 피부 때문인지 무척 건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스스로 던진 농담에 노파는 재미나다는 듯 연신 웃어댔다.     


 ……     


 졸지에 놀림거리가 된 것 같아 그녀는 입을 꼭 다물었다. 어깨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아이, 됐어, 됐어. 지 딴에는 말 못하는 기막힌 사연이다 이거지. 늙은이들은 이만 빠지자고. 우린 이만 갈라요. 알아서 짐 풀고 잘 쉬다가소.     


 ―글고 현금만 받으니께 그리 알고.     


 그렇게 말한 두 노파는 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람 뒤로 진득한 그림자가 늘어졌다. 

    

 서늘한 공기가 검처럼 폐를 찔렀다.          





 소금기를 한가득 머금고 날아오는 바닷바람.

 뼈를 파고드는 추위.

 거대한 용의 그림자마저도 물들일 만큼 짙은 어둠.     


 이것들은 지붕과 벽이 있는 곳에 들어가는 것으로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뒤흔드는 파도와 가슴속 공동은 피할 길이 없었다.     


 바다와 파도를 뒤덮을 수 있는 건 하늘과 바람뿐이야. 하늘에서 태어나 바람을 등에 업은 한 마리의 용뿐이야.     


 그녀는 그렇게 결론 내리고 하늘과 바람을 맞으러 갔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사슴뿔과 소의 귀와 비늘과 발을 가진 거대한 뱀을 만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바다다.     


 그녀는 목에 힘을 주어 말해보았다.     


 바다야.     


 한 번 더.     


 바다.     


 바닷바람이 볼을 할퀴었다.     


 습관적으로 앞섶을 여민 그녀는 텅 빈 가슴 부근을 내려다봤다.     


 빈 곳으로 파도 소리가 파고들었다.


 모래사장 위로 내려앉은 두툼한 그림자가 마냥 검게 너울거렸다.     


 그림자는 파도로는 물들일 수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바닷바람에 익은 그녀의 차가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림자를 적셨다.          





 무테안경을 쓴 피곤한 인상의 의사,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한다. 

    

 ―약을 드시면 몇 시간 정도는 정신이 멍할 수 있어요. 집 근처를 산책하는 건 괜찮은데, 되도록 외부활동은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햇볕을 쬐는 건 좋으니 꼭 하루에 한 번은 차분히……     


 집 근처 산책은 괜찮지만 본격적인 외부활동은 금하고 하루에 한 번 반드시 햇빛을 쬐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그녀는 물음표를 띄웠다.     


 물음표 너머 의사가 아랑곳 않고 덧붙였다. 몇 번이고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듯 분명한 어조로.   

  

 ―약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꼬박꼬박 드셔야 해요. 조금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이 약이 환자 분을 살린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이제부터 이 약이 공기라고 생각하세요.   

  

 ……     


 그녀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럼에도 의사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진료를 마무리했다.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릴 거라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꿈도 야무지지.          





 지금 나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니 대답할 사람은 이 세상을 탈탈 털어봐야 한 명이 넘지 않을 터.


 ……바다를 보러 왔어요.     


 한참을 망설이며 혀로 입안의 말을 한바탕 굴렸다. 그녀는 대답했다.     


 파도를 보러 왔어요.     


 파도 하나 없는 빈 바다는 을씨년스러웠다.          





 집에 들어서자 곧바로 평소와 다른 점을 느꼈다.


 현관 센서등이 그녀를 반겼다.     


 이외에 일을 마치고 귀가한 그녀를 맞이하는 존재는 없었다. 달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만이 온 집안에 덕지덕지 들러붙어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그녀의 물음에도 남편은 말이 없었다.     


 산책 갔어? 하율이 잘 시간인데 아직도 밖에 있으면 어떡해.     


 계속되는 침묵.


 그녀는 짧은 한숨에 짜증을 실어 말했다.     


 여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파도가 보이는 집’     


 그 옆에는 조그맣게 <민박>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지리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 작명.  

   

 민박집 현관을 걸어 나와 2차선 도로만 건너면 곧장 모래사장을 밟을 수 있다.     


 모래사장이 끝나는 지점은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고 그곳은 당연히 파도가 끝나는 곳이다.     


 파도를 가장 자세히 볼 수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열심히 바다를 헤엄쳐온 파도가 힘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는 곳이라니.     


 왠지 모르게 낭만적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파도를 보러 바다를 찾은 그녀가 마다할 리 없는 곳이었다. 파도가 보이는 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그때 건물 뒤쪽에서 사람의 형체를 한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일전에 봤던 그 고양이다. 눈으로 바다를 옮기는.     


 거리가 꽤 떨어져 있음에도 고양이가 풍기고 있는 긴장의 감촉이 전해졌다. 

    

 고양이는 서풋서풋 마당을 가로질러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었다. 

    

 어디 가니.     


 인간의 부름에 반응할 존재가 아니었다. 바람과 바다와 파도만큼이나 자유로운 존재였다.  

   

 그녀는 대문 밖에 서서 철천지원수를 보듯 바다를 주시했다.


 바다는 말이 없다. 가끔 보여줄 뿐이다.


 파도의 형태로 드러나는 바다의 속마음을 그녀는 알 것도 같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녀가 되물었다.     


 ―하……, 씨발.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남편의 감탄사 같은 욕에 그녀는 재차 물었다.     


 응? 여보?     


 ―일단 여기로 와. 나 혼자선 도저히 해결이 안 된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 가지. 아까 뭐라고 한 거야? 어? 하율이 어쩌고 했잖아.  

   

 반쯤 열린 눈으로 그녀는 남편의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휴대폰을 잡고 있는 손만이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파르르 몸을 떨었다.     


 긴 한숨. 뒤이어 소름이 돋을 만큼 나지막한 남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율이가 숨을 안 쉬어.     


 도대체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이었다.          





 적어도 이렇게 홀로 끝을 맞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 해본 적 없었다.

     

 심해 속으로 들어가. 깊이 더 깊이. 누구도 찾지 못할 만큼 깊이. 심해 속에서 파도를 걱정하는 바보는 없어. 물고기는 바다에 젖지 않아. 용은 바람에 날아가지 않아. 바다가 일을 하건 말건 숨을 쉬건 말건 무슨 상관이야.     


 그녀는 약을 삼키고 눈을 닫았다.     


 뒤이어 향긋한 소금 냄새와 모래를 핥는 게걸스러운 소리가 귀에 들어찼다.          





 문설주에 몸을 내맡기듯 기대어 바다를 건너다봤다.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잊고 말았다.


 어제는 진득한 열대야에 잠 못 이룬 것 같았고 사흘 전에는 태양 아래서 빛나는 낙엽송 열매를 구경한 것 같았다. 조만간 함박눈이 내려 지붕을 덮을 것도 같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옅은 회색빛으로 온몸을 덮은 고양이 한 마리가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그녀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다리를 감춘 채 배를 깔고 엎드린 모습이 마치 알을 품은 어미 새 같았다.   

  

 충만한 생명을 담아낸 번뜩거리는 눈동자에 그녀는 멈칫했다.


 바다의 빛깔을 그려낸 눈동자.     


 고양이는 한참동안 한 자세를 고수하더니 옴지락옴지락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이내 머리를 두어 차례 털어내고 파도처럼 영민하게 내달려 반 뼘 가량 열려있는 대문으로 빠져나갔다. 

    

 어디 가니.          





 바다까지는 아직 서너 발짝 거리가 있었다.     


 호흡하지 않는 바다는 그녀의 발을 핥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삼키지 못할 것이다.   

  

 바다가 호흡을 멈췄다.     


 숨을 쉬어.     

 숨 쉬어, 바다야.     


 그녀의 가슴이 분노와 슬픔으로 팽팽하게 부풀었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녀와 남편.


 그 둘에게는 더 이상의 결혼생활을 유지할 인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한 발짝 걸어갔다.     


 다시 한 발짝.     


 마지막으로 한 발짝 더.     


 그때 꿀렁, 작은 파도 하나가 그녀의 발가락 끝을 핥았다.          





 그녀는 무엇을 둘러싼 것인지 모를 높지 않은 시멘트 담을 오른편에 두고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걸었다.


 그대로 오 분 즈음 걸었을까.     


 시야가 확 트였다.


 낙상을 방지할 요량으로 쭉 둘러쳐진 나무 울타리 너머로 동백 몇 그루가 듬성듬성 솟아있다.     


 그녀는 목을 쭉 빼고 높이를 가늠해봤다.     


 이곳에서는 바다가 더 황황히 보였다. 파도가 더 선명히 보였다.     


 이곳에서 본 바다의 얼굴은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들인 어린 학생처럼 수줍고 여린 인상이었다.          





 양회색 안개가 사위를 에워쌌다. 전날 봤던 안개보다 훨씬 짙고 선명한 안개였다.   

  

 그것은 삽시간에 바다를 뒤덮어버렸다. 바다가 모습을 감추고 간헐적으로 미약한 숨결을 내뱉듯 파도 소리만 들려주었다.     


 파도는 바다가 호흡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바다의 숨소리를 귀담아들으며 그녀는 재색 안개가 햇빛에 부서지길 기다렸다.          





 오늘의 파도는 기괴한 비명처럼 들렸다. 깊은 바다에 갇혀있는 누군가가 보내는 구조신호처럼. 용의 필사적인 포효처럼 들렸다.     


 배 속이 움츠러들고 위가 뒤틀려 기껏 먹은 음식을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벌렸다.     


 텅 빈 위는 위액만 내보낼 뿐이었다. 유백색의 액체.          





 아이의 작디작은 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굳게 닫혀있는 눈. 윤기를 잃은 피부. 죽음이 휘감아버린 몸뚱어리.     


 그녀는 절망감과 공허함에 휩싸였다.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아이의 끝을 옆에서 지켜보지 못했다는 외로운 사실이 더 괴로웠다.    

 

 생명의 빛을 잃어가며 고통에 신음했을 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지 못한 현실이 그녀를 삶의 저편으로 밀어냈다.     


 조금 더 밝은 미래를 꿈꿔왔다.


 조금은 더 환하고 번쩍번쩍 예쁘게 빛나는 그런 삶을, 그녀는 바랐다.          





 바다는 그녀의 방문이 몹시 기쁘다는 듯 부지런히 파도를 보내주었다.


 철썩철썩. 환영의 박수.          





 ―나도 도저히 모르겠다고! 왜 자꾸 나한테 묻는 거야.   

  

 ……당신이 아빠잖아. 그전에 의사잖아.     


 ―의사면 뭐, 모든 병을 다 알고 고칠 줄 알아야 돼? 나라고 모르고 싶겠냐고.   

  

 ―저, 보호자님?     


 세상 모든 짐을 끌어안은 것처럼 고단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흉선과 림프절이 비대해졌다는 진단의의 말까지만 듣고 그녀는 실신하고 말았다.          





 응급실에 도착한 그녀는 한눈에 남편을 찾을 수 있었다.    

 

 평소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한 표정과 냉정한 눈빛을 유지했던 그의 얼굴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있었다.     

 얼굴이 무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내 얼굴은 어떨까.     


 그 순간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거울을 볼 자신이 없었다.          





 ―죽을라믄 혼자 뒤지지. 애먼 고양이는 왜 데리고 간대. 욕심 한번 지독허네. 

    

 허리를 접은 노파가 그녀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물었다. 못 봤던 고목나무 단장을 쥔 모습이었다.


 오늘은 혼자였다.     


 노파의 지적에 그녀는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재색 고양이 한 마리가 죽은 듯 몸을 웅크린 채 안겨있었다. 말똥한 두 눈이 그녀에게 향해있었다. 

    

 바다. 바다가 담긴 눈.     


 대답도 없이 우뚝 서있는 그녀가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노파는 버럭 짜증을 냈다.  

   

 ―오늘은 내가 봐버렸응께 글렀어. ……아, 얼릉 안 나오고 뭐한대?     


 친밀함을 드러내는 강아지처럼 파도가 살포시 발목을 물었다.     


 발목을 타고 전해져오는 바다의 기운에 그녀는 이제 막 샤워를 마친 것 같은 상쾌함을 느꼈다.   

  

 모래사장 위에 고양이를 내려놓자 꼬리를 세워 어기적어기적 바다를 등지고 걸어갔다.          





 그녀의 불안과 조급증은 더 커져만 갔다. 머릿속 파도가 더욱 거세어졌다.     


 그녀는 유일한 짐이라고 할 수 있는 배낭 깊숙한 곳에서 약을 꺼냈다. 물과 함께 삼켰다.    

 

 이윽고 조용해졌다.


 불안도 공포도 파도도, 모든 것이.     


 그녀는 비칠비칠한 걸음으로 현관을 나섰다.     


 바닷바람이 민박집에서 품고 온몸의 온기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파도가 모래사장을 후려치듯 포말을 터트렸다.     


 유백색의 거품.


 포말이 터져 천둥처럼 울렸다. 가끔은 마당을 지키는 개처럼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그런 소리들이 그녀는 참 좋았다. 바다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 바다에 있다.


 파도가 이빨을 세워 달려들었다.     


 그녀는 몸에 힘을 빼고 바다에 드러누웠다. 바다는 반갑다며 옷을 적시고 연신 등을 핥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청옥색 바다 위를 수놓듯 터지는 하얀 파도는 분명히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끝을 찾아온 그녀가 여분의 삶을 확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슴에 닿는 따스한 촉감과 생명체가 필연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호흡을 그리워했다.    

 

 숨을 쉬어 바다야.     


 그래, 그거야. 숨을 쉬어.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억지로 눈을 떴다. 두 눈으로 매운 바닷물이 달려들었다.     


 두 눈에 바다를 담을 수 있다면 말라비틀어진 몸뚱어리 같은 건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어.     


 그녀는 생각했다.          





 ―너만 부모지? 그치?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죽어라 일만 하고, 너는 슬프다고 밖으로만 나돌지. 그치? 나는 부모도 아닌 거야. 애기 하나 못 보는데 무슨 부모겠어.   

  

 남편은 새된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분노와 짜증보다는 한탄과 자포자기에 가깝게 들렸다.


 얼마간의 자기혐오도 배어있는 듯했다. 나직한 목소리와 정갈한 문장으로 만들어진 비명을 내지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우뚝 서있었다.     


 ―어디야. 당신 지금 어디 있어? 말만 해. 내가 갈 테니까. 응? 어디야? 그것만 말해봐. 

    

 남편의 애원 섞인 물음에 그녀는 무심코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지금 어디 서있는 거지?     


 나는 바다 한가운데를 걸어가고 있고 파도 위를 내달리고 있어요.


 심해 속을 헤엄치고 바닷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있어요.


 모래사장을 뛰어다니고 동백나무 숲 그림자에 숨어있어요. 한 마리의 용처럼. 

    

 그런 대답을 생각해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은 혀가 문제인 건지, 굳게 닫힌 입술이 문제인 건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창문을 열었다. 파도 소리가 달빛 위에 올라타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는 부스스 눈을 뜨고 솔방울 모양의 금속추가 달려있는 뻐꾸기시계에 시선을 내던졌다. 

    

 뻐꾸기 알람 기능은 고장 났는지 정각이 되어도 뻐꾸기는 문 뒤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2시 35분.     


 오전이냐 오후냐 구분하기 위해 굳이 창문을 열어 해가 떠있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자정을 막 넘긴 시간에 잠들었으니 필시 오전일 것이다. 요 근래에 깊게 잠드는 법이 없었다.  

   

 간밤에 약을 먹고 잤다는 사실까지는 무사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망가진 뇌와 몸은 치유될 기미가 없었다.     

 평소에 해왔던 일들을 평소처럼 하나씩 해나가면, 그렇게 하면 평소의 컨디션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일상을 되찾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일상이 무너졌던 기억을 지우고 그저 일상을 지키는 일이 아니었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눈과 귀와 코를 닫고 머리와 가슴을 비우면 평상이 지켜지는 것 아니었나.


 하며 품었던 안일한 생각이 그녀는 덧없게 느껴졌다.     


 애초에, 내가 회복되길 바랐던가?     


 너무 먼 곳까지 왔다. 더 끔찍한 건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방이 벽이고, 바다였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그녀는 낡은 협탁 위에 놓인 알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누가 가져다 놨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러자 파도가 잠잠해졌다. 그녀는 다시 몽롱한 기운을 앞세워 잠을 향해 질주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두 시간이 훌쩍 흐른 뒤였다. 숙면을 취한 것도 아니었지만 몸은 수상할 정도로 멀쩡했다.     


 그녀는 대충 이불을 한쪽으로 몰아내고 일어나 그대로 방문을 나섰다. 부엌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입을 대고 들이켰다. 물이 참 달고 맛났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한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대로 식물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녀는 소화기관 없이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는 식물의 차분한 성정을 떠올렸다.     


 다시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할까 했지만 그녀가 연 것은 현관문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거친 질감의 새벽공기가 들이닥쳤다.


 평소라면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려야했다. 하지만 그녀는 추위에 떨지 않았다. 온몸이 무감각했다.     


 돌연 약기운이 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약효가 떨어진 건가? 혈류가 급속도로 온몸을 휘감아 몸을 데웠다.     


 망각과 착란.


 행복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어느 쪽이 더 이로운 걸까.     


 그녀는 고민해봤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알약이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망각인지 착란인지, 혹은 둘 다인지,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뒤돌아 방으로 되돌아간 그녀는 습관적으로 외투를 챙겨 입었다. 다시 집을 나서 바닷가로 걸어 내려갔다.     

 바닷가?     


 맞아, 바다를 찾아왔었지.     


 모래사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해무에 몸을 감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피가 돌면서 약효가 몸 곳곳에 퍼지는 듯했다. 머리가 멍해졌다.          





 입고 있던 티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비를 맞은 듯 몸이 차가웠다.     


 방은 암흑에서 옅은 달빛만큼을 뺀 정도로 어두웠다.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려 창문을 내다봤다. 

    

 보름에 가까운 달이 대롱 매달려있었다.


 달은 말이 없다. 미약하고 불규칙한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녀는 시간의 흐름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조각난 시간은 부지불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시간이 자꾸 흘러갔다.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시간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순전히 우연한 만남이었다고 생각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의사가 조제실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키가 컸고 냉혈한으로 보일만큼 표정을 담지 않은 얼굴이었다. 목소리 또한 지극히 침착했다.     


 ―김 약사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장차 남편이 될 남자를 쳐다보았다.   

  

 네? 필요한 거 있으세요?     


 ―저랑 같은 김 씨네요. 저도 김 씨에요. 신기하네요. 그죠?   

  

 전혀 신기하지 않은 사실을 신기하다고 말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던 그녀는 무심결에 웃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이 났다.          





 안개. 다시 안개다.

 적막한 안개를 뚫고 바다가 부지런히 파도 소리를 보내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약만큼은 잘 챙겨 드셔야 해요. 시간에 맞춰서―     


 그녀는 파도 소리에 잘려나간 혼잣말을 구태여 이어붙이지 않았다. 누군가 몇 번이고 당부했던 말이었는데.          




 고양이, 고양이가, 그, 고양이요.     


 뚝뚝 끊어지는 그녀의 말에 노파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니께 고양이가 어쨌다는 거여. 아까부터 계속 고양이 타령만 하고 있담.    

 

 고양이가, 없어요. 하얀 고양이.     


 노파가 미간을 모았다. 지팡이 덕분인지 허리만큼은 한결 편안해보였다.     


 ―처자가 이틀 전까지 잘만 데리고 있었잖어. ……근디 그 놈은 흰색이 아니라 먹구름맨키로 시꺼먼 색일 것인디?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경계에 서있음을 깨달았다.     


 땅과 바다의 경계.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 극복과 기권의 경계. 망각과 기억의 경계. 평정과 광기의 경계. 소생과 침몰의 경계. 동물과 식물의 경계.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 유와 무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이내 노곤함이 밀려왔다. 온몸이 차분히 이완되어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것 같았다. 

    

 오래된 형광등 불빛은 태양처럼 눈부셨다.     


 그녀는 눈을 감아 빛을 차단시켰다. 눈꺼풀 위로 내리꽂는 빛의 흔적만큼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더 밝아져라. 더. 더.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잠이 이끄는 심해 속으로 하염없이 빨려 들어갔다.  

   

 잠들었다는 자각도 없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잦아졌다.     


 집을 나섰다. 어느새 날은 밝아져있었다.     


 그때 대문을 통해 들어온 고양이는 푸른빛 눈으로 마당 주변을 더듬었다. 이내 그녀를 발견하곤 반갑게 울었다.     


 그 울음에 담겨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알고 싶었다.     


 반가움일까. 그리움일까. 원망일까. 죄책감일까.    

      




 그녀의 정신은 이미 파도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파도가 이끄는 곳으로 나아갔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걸…   

  

 ―거서 뭐하는 겨?     


 힘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옆구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그녀는 움찔했다. 한 번 들었다고 그새 익숙해진 모양이다.   

  

 모래사장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노파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 안녕하―     


 파도 소리가 그녀의 말을 능숙하게 채갔다.     


 항상 한 걸음이, 마지막 한 호흡이 문제였다.          





 바다는 공고한 침묵 위에 놓여있었다.     


 그녀는 바다를 사랑했다. 쭉 사랑했던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줄곧 그래왔던 것 같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행동이나 말투에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사랑으로 점철된, 사랑받도록 설계된 존재.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약효가 떨어졌다고 생각한 그녀는 부르튼 입에 황급히 알약을 넣고 꿀꺽 삼켰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울적한 목소리로 “아가는?” 하고 물었다. 

    

 두 볼에 찬바람이 스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벽공기가 도둑처럼 온기를 빼앗아갔다.  

   

 소중한 물건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처럼 그녀는 다급하게 외투를 여몄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배가 미끄러지듯 수평선을 지나고 있었다.     


 소금기를 가득 먹은 눅눅하고 미끈한 공기가 뺨을 적셨다. 삽시간에 바짓단이 축축하게 젖었다. 


         



 생각의 조각들이 죄다 따로 놀았다. 낮과 밤을 나누는 경계가 모호해졌다.     


 나는 바다에 왔고, 고양이를 봤다. 머리가 허옇게 센 민박집 할머니를 만났고, 의사도 만났다.


 아, 의사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났나?     


 ……맞아. 그랬다. 다른 할머니도 있었는데. 여기까지 기차를 타고 왔던가? 하율이 분유는 챙겼나? 고양이는 점박이무늬였지. 오늘 저녁 약은 먹었던가?


 ……지금이 저녁은 맞나? 새벽이었나?     


 차가운 달빛이 파도 한 점 없이 고요한 바다의 정적을 감쌌다.     


 이것은 결코 그녀가 상상했던 최후가 아니었다.     


 조금은 더 극적이고 감동 같은 것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무언가가 완결되는 기분에 휩싸여 흐뭇한 미소 하나쯤은 걸치고서 끝을 보게 될 줄 알았다.          





 그녀는 어스름한 가로등이 비치는 도로를 내다봤다.   

  

 시선을 들어 바다 저편을 바라보았다.     


 마구잡이로 솟아나는 거친 파도에서는 위엄의 기운마저 풍겼다. 피가 빠르게 식어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온몸을 더듬이 삼아 자신의 기색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단박에 파악했다. 이 인간에게 정을 줘도 되는 걸까. 탐색하는 눈빛이었다.     





 꿈을 꿨다.

 바다와 파도는 꿈속까지 따라 들어왔다.     


 품에 쏙 안길 만큼 자그마한 아이가 달빛 아래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앙증맞은 팔다리를 허우적댈 때마다 연약한 파도가 일었다.     


 그녀는 그 황홀한 광경에 전율하며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눈을 뜨자 탁한 형광등 빛이 달려들었다. 또 불을 끄지도 않고 잠든 것이다.    

 

 덜컹대는 소리가 꿈의 여운을 걷어갔다.     


 창문이 바람에 걷어차여 요란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자신을 들여보내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파도가 도마뱀처럼 모래사장을 날름 핥았다.     


 연갈색 모래가 고동색으로 시시각각 바뀌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녀는 저 파도 한 줌을 끌어다 온몸을 적시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도 더 짙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선명해질 것 같았다. 더 선명해져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었다.     


 새벽 한가운데 잠에서 깨어 빈속에 냉수를 마신 것처럼 가슴이 안쪽에서부터 서늘해졌다.  

   

 뒤이어 코끝으로 매운 소금기가 들어왔다. 숨은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았다.    

 

 그저 짙은 청록을 띠는 바다만이 그녀를 감싸 안을 뿐이었다.     


 두터운 적막 틈새로 청랭한 파도 소리가 맞춤하게 들어찼다.     


 그녀는 마치 이 순간을 손꼽아 기다려온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것.

 이렇게 발끝부터 머리꼭대기까지 바다에 잠기는 것.

 파도의 흐름에 따라 이곳저곳을 누비는 것.

 미련 한 조각, 희망 한 숨, 빛 한 점 남지 않은 텅 빈 몸으로 바다를 받아들이는 것.

 바다가 되는 것.

 머릿속에 있는 파도를 내보내는 것.

 용과 함께 심해 속에서 잠드는 것.     


 그것이 그녀가 바라왔던 모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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