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어쩌면 오르는 길이 아니라 내려가는 길 같은지도 모른다. 오르는 길이 목적지를 향한, 아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도전과 성취욕이라면, 그건 일상의 삶일 뿐이고, 느긋하게 이 길 저 길 옆길로 샐 수도 있는 하산길이 바로 여행의 느긋함일 것이다. 그런 너그러움이 있어야 대상도, 나도 제대로 보인다.
고은 시인의 눈도 그랬던 모양이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을 내려갈 때 보았으니, 올라갈 때도 보면 더 좋을 것이다. 올라가면서 나무에게 말도 걸어보고, 새에게 귀를 열어주며, 들꽃에게 눈이라도 맞춰주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에 다다라야 한다는 조바심이 마음도 귀도 눈도 닫아버린다. 그게 우리 일상의 삶이다. 그러나 내려갈 때는 봐야 한다. 그마저도 못하면 산에 간들 헛간 것과 다르지 않다.
인문학자 김경집, <생각을 걷다> 중에서
인생의 내리막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느긋함과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어른스러움을 주기 때문이다. 힘들여 올라가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길을 차지하지도 않고, 먼저 올라간 것을 우쭐거리며 무용담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그래서 입은 닫을수록 좋고 지갑은 열수록 좋다고 한다.
입을 닫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말할 기회를 먼저 주고, 더 많이 주기 위함이다. 그래야 가끔씩 한마디 하는 어른들의 말에 그들은 귀도 열고, 마음도 열고, 눈도 맞춘다. 반드시 지혜가 담긴 심오한 말을 골라 '어른답게'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과 눈높이가 달라 할 말이 크게 없더라도 가벼운 눈웃음만으로도, 고개를 몇 번 끄덕여주는 것만으로도 어른의 모습은 충분히 어른답다.
지갑을 여는 것은 돈을 주어 환심을 사거나 돈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돈은 재물이기도 하지만 소통의 한 수단이고 어른이 먼저 소통의 손길을 내민다는 뜻이다. 결코 많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차 한잔, 커피 한잔 나눌 수 있는 작은 정만으로도 어른의 따뜻함은 오롯이 전해진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오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길이다. 내려가는 길마저 먼저 가겠다고 허둥지둥하면, 내려가는 사람도 올라오는 사람도 모두 힘든 길이다. 느긋함과 너그러움이 즐겁고 아름다운 길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