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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타멀스 Mar 04. 2022

미로 탐험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대한 여러분만의 지도를 그려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시절에 자신만의 지도를 그리지 못하면 40대, 50대, 60대가 되어서도 남의 지도를 기웃거리게 됩니다. 남의 지도를 뜯어내 대충 맞춘 ‘누더기 지도’를 들고, 그걸 자기 지도라고 믿게 됩니다.
뇌를 연구하는 물리학자 정재승, <열두 발자국> 중에서


베이비부머 또는 7080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나는 솔직히 나의 지도가 없었다. 종이 위에 내가 그린 지도가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다. 괴나리봇짐 하나 둘러메고 남이 그려준 지도를 보며 길을 떠났고, 강을 건넜고, 산을 넘었다. 어떤 때는 그곳이 계곡인지도 모르고 들어가야 했고, 느닷없이 앞에서 낙타가 나타난 뒤에야 내가 사막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 가끔, 정말 뭔가 이상하고 심상치 않다 싶으면, 주먹 들어 하늘을 찔러보기도 했고 짱돌 들어 최루탄 연기 속으로 던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지도를 만들지는 못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누군가 만들어 놓은 미로 속에 갇혀 보이지도 않는 출구를 찾겠다고 이판사판 허겁지겁 달리며 60년이 넘는 세월을 꾸역꾸역 욱여넣듯 살았다. 그리고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세상을 욕하지 않는다. 어차피 삶은 애초부터 나의 의지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세상은 우리에게 보금자리만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내가 그린 지도를 들고 원하는 방향대로 여행하지는 못했지만, 질곡의 미로를 줄기차게 탐험하여 마침내 미로에서 벗어날 지혜를 얻었다는 작은 성취감을 느낀다. 요즘 아이들은 미로 탐험을 가상 게임으로 즐기고 있다는데, 나는 60년을 넘게 그 모든 미션을 가상이 아닌 현실에서 온몸으로 부딪치며 탐험을 했으니, 그 짜릿한 스릴을 맛보았던 경험도 감이라 한다면 부수적 쾌감이라 하겠다.


지도 없이도 용케 여기까지 왔다는 성취감이나 그 과정에서 누렸던 쾌감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여기까지 살아왔으니 어떤 모양의 삶이 됐건 그것은 나의 삶이고 역사이다. 설령 번듯하게 내세울 것 하나 없고 심지어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을 지라도, 아직도 살아갈 날이 솔찬히 남아있는데 지나온 나의 삶을 억지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 지나고 보면, 그러니까 미로를 탈출하여 그 미로가 내려다보이는 망루에 앉아 굽이굽이 굴곡진 인생길을 반추하다 보면, 괜스레 눈물도 나고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자신의 인생을 구깃구깃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일은 아니다.


미로를 벗어날 출구를 찾는 방법과 시점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다. 물론 미로가 아니라 사통팔달 대로를 무사통과하며 살아온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7080 세대들은 고난의 길을 걸어왔고 몸도 마음도 상당히 지쳐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세대는 고난에 익숙해져 어지간한 것은 대충 뭉개버리거나 눈 하나 깜짝 않고 해치울 수 있다. 비록 몸이 따라주지 못해 머뭇거리며 나이 탓을 할 때도 우리는 버티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미로를 헤쳐나간 과거의 경험이 용기와 지혜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도 누구에게나 부끄러운 과거, 잊고 싶은 과거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족했고 떳떳하지 못했던 것에만 얽매어 어깨가 쳐진 채, 과거라는 족쇄에 묶여 좀비처럼 살아갈 일도 아니다.


 나의 과거는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버팀목이고 미래로 가기 위한 재산이다. 과거를 족쇄라고 생각했다면 아직도 미로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 머릿속에 채워놓은 족쇄가 발목을 옥죄어 미로를 탐험하는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가상의 족쇄에 끌려가는 것이다. 그 족쇄를 지우면 굽이진 미로에서 초원을 보고, 사슴을 만나고, 어둠이 몰려와도 풍월을 읊는다. 미로 여행의 고수나 달인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혼돈의 미로 속에서 나를 잃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60년 넘게 누구의 지도를 들고 여행을 했건, 어떤 난이도의 미로를 뚫고 왔든, 그 속에서 동력을 얻어 이제 새로운 지도를 그려 보자. 도화지 위에 과거가 어른거리지만 그것은 미래를 비추는 안테나이고 나를 일으켜 세우는 지렛대라고 생각하고 연필로, 색연필로, 크레용으로 여생의 지도를 그려보자. 남은 인생이 그 지도대로 갈지는 몰라도, 잠자다 이불에 그린 7살 오줌싸개의 유치한 지도가 될 지라도, 정말로 나만의 지도를 그려 보자. 젊었을 때 벽돌깨기나 갤러그 좀 했다면 게임하듯 말년을 즐길 수 있는 미로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겠다. 늙었지만 늦지는 않았다. 미로 탈출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미로 탐험의 시작이다. 잘난 과거에 집착하지도 말고 못난 과거에 질척거리지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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