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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타멀스 Jul 26. 2022

후드득 후드득, 쏴아

교장실 문이 열리면서  교감이 들어왔다. 교장실 벽면에 걸려있는 게시물을 둘러보고 있던 교수가 고개를 돌려  교감과 눈을 맞춘다.

“의자에 앉아 계시지.”

 교수는 말없이 미소만 지으며 서 있다.

“커피 한잔 드릴까요? 지금도 봉다리 커피 드시나요?”

 교수는 미소 띤 얼굴을 유지하려고 양쪽 입꼬리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기다린 김에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교감이 교사 휴게실로 가서 커피를 가져오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의자에 앉았다.  교수는  교감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 다정함을 듬뿍 담으려는 듯 미간을 위로 살짝 밀어 올리고 있었다. 평교사 때부터 스커트를 입지 않고 바지만 입은  교감이 다리를 꼬고 고쳐 앉으며 커피를 마신다.

 선생님, 아참,  교수님...”

먼저 말을 꺼내려던  교감이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어색한 웃음과 함께 커트 머리를 쓰다듬자  교수도 커피 잔을 내려놓고 들어 올린 미간을 푼다.

“괜찮아요. 나도  교감보다 선생으로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네요. 오늘은 호칭을 그냥 선생으로 합시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은?”

“3박 4일 일정으로 대전에서 연수받고 있어요. 여전히 유쾌하시고 열정은 식을 줄 모르고 그래요. 오늘  선생님 강연을 듣지 못해 무척 아쉬워하셨어요.”


 나이 차이가 크지 않지만 그들에게 손종득 교장은 동료 교사이면서 스승 같은 존재였다. 30년 전 그가  학교에서 펼치고 저지른 일들이 고스란히 그들의 몸에 배기 시작하면서 그가 미친 영향은 그들의 뇌구조를 바꿀 정도였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한 사립고등학교에 참교육의 씨앗을 뿌리겠다고 학교를 갈아엎기 시작했을 때 그는 학교를 말아먹을 놈이라고 바가지로 욕을 얻어먹으며 이리저리 불려 다니기도 했지만,  진심과 용기로 버텨냈고 결국 참교육의 씨앗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지금도 교직원 워크숍이랑 이사장님과의 대화는 계속하고 있죠?”

“그럼요. 교장 선생님도 대단하지만 이사장님도 정말 한결같아요.”


이 학교에서 20년 넘게 이어져 온 1박 2일 워크숍은 당시 손종득 교사의 제안이었다. 새 학년이 시작하기 전 2월 말에 전 교직원과 재단 이사장이 한 곳에 모여 진행하는데, 이틀째 오전에는 전날 토론했던 영역별 주제별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고 점심 먹기 전까지 이사장과의 대화를 한다. 워크숍은 지금까지 한 번도 건너뛴 적이 없고 이사장이 참석하지 않은 적도 없었다. 교수는 교장실 한쪽에 걸려 있는 이사장의 사진들을 쳐다본다. 하나는 현 이사장이고 그 옆에는 초대 이사장이다. 초대 이사장은 현 이사장의 아버지다. 현 이사장은 초대  이사장을 아버지나  이사장이라 부르지 않고 꼭 초대 이사장이라 불렀다.


"아버지를 설득하고 교직원들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려는 노력이겠죠."

"그래서 교직원들이 최선을 다 하기도 하죠."


손종득 선생이 어느 날 교무회의에서 자신이 전교조에 가입할 것이라며 함께 할 선생님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는 초대 이사장 시절이었다. 느닷없이 전교조 깃발이 학교에 나부끼자 학교는 술렁거렸고 이사장과 교장 선생님은 당황했다. 그것은 마치 한여름 예고 없는 소나기 같았다. 그 소나기에 허둥대는 사람도 있었고 시원함을 느낀 사람도 있었다. 교무실은 한동안 불편하고 어색한 분위기에 선생님들은 서로 대화하거나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어쩌다 일부 선생님이 손 선생에게 일방적인 욕설과 삿대질을 퍼붓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사장과 이사장 동생인 교장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려는 그들 나름의 아름다운 행위였다.


“교장 선생님이 내년에 정년인가?”

“내년까지니까 내후년 2월 말에 퇴임하게 되죠.”


손 선생이 교감이 되고 이어서 교장이 된 것은 순전히 현 이사장의 뜻이었다. 손 선생은 훌륭한 교사이며 열정적인 교육운동가이고 뛰어난 조직 관리자였지만 교감의 자리를 원하거나 탐하지 않았다. 그의 결혼식을 주례했던 교장 선생님을 배신하고 전교조 활동을 한, 인륜을 저버린 놈에게 교감을 시킬 리도 만무했고, 학교발전기금을 빙자한 교사 채용 비리를 폭로하고 자신도 발전기금 명목으로 얼마를 냈지만 그 돈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모른다며 교사 채용과정의 모든 것을 공개하라는 그를 재단에서 목을 자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사실 대분부의 교사들은 연줄과 돈줄로 학교에 들어왔으그 줄을 숨기고 있었다. 특히 돈줄로 들어온 교시들은 채용과정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발이 저렸고 떳떳하지 못한 자신을 남몰래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손 선생은 감춰진 자신의 돈줄을 드러내 보이고 그 돈줄로 얽어 놓은 목줄을 풀어버렸다. 얼마 후 다른 교사들도 손 선생의 커밍아웃에 용기를 얻 숨겨놓은 줄을 밖으로 내걸고 몇 명씩 전교조에 동참했다. 전교조라는 강 속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다시 태어난 것이다. 교사가 변하고 학교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럼, 그때 가면 류 선생이 교장이 되겠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 학교는 교장이 누구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선생님들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님들이 실천하는 다양한 교육활동을 교장은 그저 행정적으로 지원할 뿐이에요. 이사장님도 자신의 역할은 호미 자루라고 했잖아요. 그 말 기억나세요? 호미를 오래 쓰다 보면 호미 자루가 헐렁해질 때가 있고, 그러면 호미를 거꾸로 세워 돌멩이에 내리 쳐야 된다고. 이사장이 헐렁해지면 자신에게 충격을 주라는 거요.”  


초대 이사장이 물러나고 30대 중반 대학교수인 둘째 아들이 이사장직을 승계했을 때 학교는 또 한 번의 소나기 세례를 받았다. 학교를 바꿔보겠다는 아들의 강력한 요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학교 밖에서 들어오는 몇몇 기관들의 가당찮은 잔소리와 압력이 싫었던 초대 이사장은 다른 가족들의 반대를 물리치과감한 결단을 내렸고, 그 소나기의 강도는 손 선생이 몰고 온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새로운 이사장의 첫인사 말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학교를 살리고 교육을 바꿔보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학교가 죽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에 맞게 패러다임을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전교조 방식이어도 괜찮습니다. 우리 학교 구성원들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다면  못 갈 길이 없고 머뭇거릴 이유도 없습니다. 저도 재단 이사장이 아닌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 그 합의 과정에 참여할 것입니다.”


"류 선생은, 그렇다면, 교감에서 다시 평교사로 내려가 수업도 하고 담임도 맡을 수 있다는 얘기네.”

"우리는 각자의 비행기를 만들고 파일럿이 되어 자신의 항로를 가기로 했잖아요. 나의 비행기는 아이들을 태우고 우주 공간을 마음껏 날아다닐 것으로 만들었는데, 교감이 되다 보니 날개 없는 비행기 안에 홀로 앉아 있는 기분일 때가 많아요.”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을 하는 날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교직원 위로 여행을 갔다. 그러나 말이 위로 여행이지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모았다는 돈으로 가는 여행이기에 학부모들에게 은근히 미안하고 부담이 되는 여행이었다. 또한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교직원들끼리 자기들 취미에 맞게 놀다 오는 것이 전부였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 마시면서, 고스톱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스톱 치면서, 어떤 사람들은 바둑판을 가지고 가서 바둑을 두고, 주변 산책로를 걷는다거나 TV를 보거나 그러면서 하룻밤 자고 오는 것이었다. 해변으로 여행을 갔지만 바닷물에 발 한번 담그지 않고 오는 사람, 계곡으로 갔지만 계곡 물소리도 듣지 않고 오는 사람도 많았다.


아버지 이사장과 달리 새로운 이사장은 교직원 여행을 같이 갔다. 그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에게 여행경비를 부담하게 하지 않고 재단에서 충당했다. 뭔가 크게 달라질 것 같은 학교 분위기, 그 속에서 어떤 교직원들은 상황 파악과 눈치 보기, 진로 탐색을 하며 머리를 굴렸고, 내 멋대로 놀다 왔던 지난 위로 여행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해변가 숙소에 짐을 풀었지만 아무도 지난 여행의 루틴을 따르지 않았다. 배정된 방에서 얌전히 대기하고 있다가 저녁식사를 위해 예약된 식당으로 모였다. 식사를 하면서도 대부분의 교직원들은 가출한 자식이 돌아와 저녁밥 먹는 모습이었다. 편안하고 즐거운 식사를 하라며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교장 선생님의 거듭된 노력도 먹히지 않았고 저녁식사는 끝까지 다소곳이 앉아 눈칫밥을 먹는 시간이었다.

“오늘 밤은 다 같이 해변에 나가 여름밤 해변 야경을 즐기는 게 어떨까요? 괜찮겠죠? 방으로 돌아가서 잠시 쉬었다가 밤 9시경에 다시 모입시다.”

이사장 당숙뻘 되는 행정실장의 지시 같은 제안에 모두 일어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사장이 나갈 때는 교장과 교감, 행정실장이 좌우를 지켰다.


 선생의 비행기는 이미 관리자용으로 바뀌었어. 나는 학교를 떠난 비행기고.”

"그러고 보니 선생님이 환경운동을 하겠다며 학교를 떠난 지가 벌써 20년이 다 돼가네요."


해변 야경은 볼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은 해변을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었고 아이들이 터트리는 장난감 폭죽을 재밌다는 표정으로 보면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고 싶은 듯했다. 이사장이 시원한 술 한잔 살 테니 한잔 하고픈 사람들은 숙소 앞 조개구이 집으로 와라는 전달을 받을 때까지도 그들은 그렇게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철제 받침대를 세우고 천막을 씌운 조개구이 집은 앞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뒤로는 해송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빈 테이블에 몇 명씩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꽤 넓은 공간의 조개구이 집은 빈 테이블이 보이지 않았다. 안쪽 조리대 옆 테이블에 이사장과 교장, 교감, 행정실장이 벌써 앉아있었고 교감이 집게로 조개를 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손 선생님의 용기에 고무되어 제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밤 11시가 넘어 많은 교직원들이 숙소로 들어갔거나 한잔 더 하러 다른 곳으로 갔을 때 이사장이 손 선생을 불러 옆 테이블에 앉으라고 했다. 이사장과 얘기하고 싶은 선생님들도 같이 오면 좋겠다고 해서 손 선생과 함께 전교조를 이끌어 가던  선생과 선생이 합석했다. 이사장이 소주잔 세 개에 술을 따르며 말을 이어간다.

“손 선생님은 용기 있게 탯줄을 끊었습니다.”

 이사장과 나이가 비슷한 손 선생은 탯줄을 끊었다고 말한 이사장의 의도가 무엇일까를 짐작하면서 술을 들이켰다.

“탯줄을 끊어야 아이가 마침내 한 사람으로 독립하듯이 손 선생님은 연줄과 돈줄로 만들어진 탯줄을 과감히 끊어버렸죠.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고 줄에 연연하지 않고 교육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고, 그래서 손 선생님과 같은 분들과 함께 우리 학교를 다시 세워보겠다고 마음먹었죠.”

교감이 조개가 수북이 쌓인 새 접시를 가져와 굽기 시작했고, 교장선생님은 술에 취해서인지 조카의 말이 맞다는 뜻인지 고개를 위아래로 가볍게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한번 들어봅시다. 손 선생님은 어떤 교사가 되고 싶어 그렇게 단칼에 탯줄을 끊었습니까?”

“제 스스로의 비행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이들에게 비행기를 태워 주려고요?”

“그렇습니다. 언제든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 겁니다.”  

“그렇지만 자신만의 비행기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 비행기를 날아가게 하는 것은 우리 교육 현실에서 쉽지 않을 텐데요.”

“그래서 탯줄을 끊었습니다. 설사 비행기를 만들었어도 탯줄에 매달려 있으면 날아갈 수 없습니다. 물론 탯줄을 끊었다고 곧바로 비행이 가능한 것은 아니죠. 비행기가 받는 중력을 이겨내야 하고, 양력과 추진력을 발휘해야 하고, 때로는 저항력으로 버텨내야 할 겁니다.”

이사장이 소주잔을 비우고 구운 조갯살을 집어 는다.

“그 과정에 이사장이 도울 수 있는 게 있습니까?”

“일단 소주 한 잔 더 받고 싶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사장과 손 선생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12시가 넘어 교장 선생님은 피곤하다고 숙소에 들어갔으나 대여섯 개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선생님들은 자리를 지키며 이사장과 손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심야 해변 토론은 새벽이 되어서야 다음에 다시 만나 더 얘기해보자는 말로 끝났다. 테이블 밑에 놓여 있는 양동이들에는 조개껍질로 가득했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밤을 지새운 선생님들의 핼쑥한 얼굴에는 변화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학교를 떠나 환경교육연구소로 날아간 선생님의 비행기에는 어떤 사람들을 태우고 다녀요?”

“마음 같아서는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다 태우고 싶죠. 사실 환경운동을 위해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새로운 비행기를 만들었거든요. 근데 사람들이 내 비행기에 올라타기보다는 한 발만 걸치고 있는 경우가 많아 비행기가 뜨고 날아가기가 쉽지 않아요.”

“그때 필요한 것이 중력, 항력, 추진력, 저항력을 점검하는 거잖아요.”

“비행기 얘기는 그만하고, 오늘 내 강연은 어땠어요?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면서도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가, 늘 되돌아보려고 하지만 잘 안되더라고.  선생은 옛날 전교조 할 때부터 직설적인 말로 토론에 활기를 넣어주는 특기가 있잖아요. 이사장을 당황하게 한 적도 있고.”


꼰 다리를 풀고 남아있는 커피를 다 마신  교감이 양손으로 커피잔을 잠시 잡고 있더니  커피잔을 내려보며 입을 연다.

“환경운동하신 분들이나 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기조에 변함이 없어요." 

 교감이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교수를 쳐다보자  교수는 얼른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마신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이 버리고 배출한 오염물질이 환경을 파괴하고 그 결과 기후가 변하고 동식물이 멸종하고,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 이거잖아요. 존재론적 위기감으로 시작하여 사람들의 도덕과 양심에 호소하는 것으로 끝내잖아요. 결정적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데 그게 뭔지 확실하지 않고 어물쩍합니다. 물론 오늘 같은 경우 교육청에서 주관하고 수백 명의 교원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강연이기에 발언의 수위를 조절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헝클어진 매듭을 칼로 내리치듯 마지막 한 방을 기대했거든요. 그게 선생님의 특기였잖아요.”

 선생의 날카로움은 여전히 가슴을 찌르는구만.

 교수는 얼굴에 언짢은 표정이 드러날까 봐 다시 입꼬리에 힘을 준다. 이어서 미간을 밀어 올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데,  교감의 휴대폰이 울린다.

“예, 교장선생님. 잘 계시죠?”

대전에서 연수받고 있는 손종득 교장의 전화다.  교감이 손 교장과 몇 마디를 나눈 뒤  교수에게 전화를 건네준다.

“아,  교수. 오랜만이요.”

 교감이 잠깐 교무실에 갔다 오겠다며 교장실을 나가자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운동장 쪽 창문으로 다가가면서 전화를 받는다. 이러저러한 안부를 주고받은 뒤 손 교장이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목소리가 진지 모드로 바뀌었다. 반가움을 담아 안부 인사를 할 때와는 달리 차분하지만 강한 목소리, 손 교장이 학교를 갈아엎은 목소리,  교수의 몸에 밴 익숙한 목소리였다.

“환경운동하는 사람들,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오전, 이곳에서 연수받고 있는 교장들 수백 명을 앉혀 놓고 10년 전에 들은 환경 이야기를 또 들려줍디다. 지금 지구 환경을 놓고 남의 집 불구경하고 와서 한가롭게 불난 집 얘기나 할 때입니까. 남의 집이 아니라 우리 집에 불이 나고 있잖습니까.”

남학생 몇 명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매점으로 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교가 운동장에 잔디를 입혔지만 이 학교는 아직도 잔디를 심지 않았다. 오래전, 교수가 학교를 떠나기 전, 도교육청에서 운동장에 잔디를 깔아주겠다고 했으나 학생회, 학부모회, 교직원회를 거쳐 정중히 거절했다. 인조 잔디를 깔겠다는 도교육청의 방침과 천연 잔디만을 고집한 학교 측이 맞서다 결국 잔디 운동장을 포기했고 그 후로는 아예 잔디 아닌 흙을 고수했다.

“그분들이 하는 말은 다 맞죠. 이런 말도 합디다. 환경으로 인한 재앙은 임계점에 다가가는 순간 마른하늘에 벼락같이 온다고. 그런데 저는 좀 달리 표현하고 싶어요. 멀쩡한 하늘에 소나기 퍼붓듯이 온다고."

이층 어느 교실에서 한 여학생이 운동장을 향해 뭐라고 소리친다. 운동장을 걸어가던 남학생이 뒤도 안 돌아보고 한 손을 들어 가운데 손가락을 세운다.

"물론 마른하늘에 벼락이라는 것은 예기치 못한 재앙이 별안간에 덮친다는 것이고 그만큼 무섭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비유적 표현이잖아요. 소나기는 실제 현상입니다. 소나기도 별안간 쏟아지기는 하지만 날벼락과는 달리 예고를 해줍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소나기를 퍼붓기 전에 후드득, 후드득, 굵은 빗방울을 두어 차례 쏟아내죠. 그리고 마침내 쏴아.”

교무실에 갔던  교감이 돌아왔다. 지금까지도 전화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문가에 서서  교수를 바라보고 있다.

“이미 먹구름은 감지되었잖아요. 날벼락은 먹구름 예고 같은 거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무감각합니다. 환경에 관한 한 우리가 좀 불편하더라도 더 공격적인 대응책이 필요합니다. 단칼의 명수인 교수 같은 활동가가 칼을 한번 뽑아 봐요. 이제는 비유적 표현으로 겁만 줄 때가 아닙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 매듭을 잘라버려야 돼요.”


학교 현관을 나와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교감이  교수를 배웅했다. 자동차 창문을 내리고 눈인사를 나눌 때 강 교수의 입술에 강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진입할 무렵 멀쩡했던 하늘에 먹구름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후드득, 후드득, 쏴아. 윈도 브러시가 정신없이 휘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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