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에서 나온 새는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간다. <데미안>
1. 할아버지의 난동
나르훵트는 작문의 천재였다. 특히 남의 말을 그의 방식대로 윤색하는 기술은 신기에 가깝다. 아무리 더럽고 잡스런 말이라도 그의 손끝을 거치면 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인용하는 명문이 되어 지식은 빈약하지만 지식인인 척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식의 젖줄이었고, 하루하루를 목표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지표였다. 금박 테두리를 두른 액자에 그의 글을 넣어 벽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큰절을 하며 크게 낭독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개망나니였다. 술을 먹지 않았을 때도 생양아치였는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막말과 망언을 스컹크 방귀 뀌듯이 뿜어낸다. 마음 약한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놀라 자빠질 만큼 위력이 강했다. 또한 참을 수 없을 만큼 역겹고 고약하기도 해서 점잖은 사람들도 점잖지 않은 말을 한마디씩 하며 눈을 흘긴다.
“저놈의 주둥아리를 고성능 세탁기에 넣고 돌려버리든가 해야지, 원.”
“쥐뿔도 없는 주제에 주둥이만 살아가지고, 참.”
그의 할아버지가 그렇게 험한 말을 뿌려대며 많은 사람들에게 왕짜증 유발 요주의 인물로 거리를 활보하고 다닐 때, 나르훵트는 할아버지의 말을 주워 담아 윤색하기 시작했다. 단어 몇 개를 바꾸고 앞뒤 맥락을 뒤집어 막말은 성현의 말씀으로, 망언은 명언으로 둔갑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가 늙어서 외장칠 힘이 모자라 허리를 구부리고 혼자 중얼중얼하는 소리, 그러다가 가끔씩 쏟아내는 헛기침 소리까지도 노인의 지혜가 녹아 있는 고고함의 결정체라고 기록했다.
나르훵트가 할아버지를 개망나니에서 성인의 반열로 올려놓은 것은 아버지가 보여준 희생과 헌신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말수가 극도로 적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아주 싫어했다. 길을 가다 사람들이 보이면 다른 곳으로 피해 가고 사람들이 있을 만한 곳은 아예 가지도 않았다. 어쩌다 사람들이 아버지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뜬금없이 찾아온 사돈의 팔촌을 본 것처럼 별난 일로 생각했다.
“누가 저 사람 입 좀 열어봐. 거미줄이 쳐 있을 거여.”
“부자간에 달라도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
“그래도 효자여! 지 아버지가 그렇게 술 퍼마시고 온갖 잡소리를 퍼부어도 군소리 한 마디 없이 뒤치다꺼리 다 하는 걸 보면 둘도 없는 효자지!”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나르훵트는 거의 매일 보았다. 가슴팍에 머리를 처박고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중얼거리면, 나르훵트는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기도 했지만, 제대로 들은 적은 없다. 할아버지의 말의 대부분은 욕설이었다. 욕설 중간중간 이어지는 말은 잘 들리지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와서 할아버지를 등에 업고 집으로 들어갈 때도 할아버지는 한 손으로는 아버지 목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공을 휘저으며 쉼 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나르훵트는 할아버지의 진실과 아버지의 진심이 궁금했다. 특히 아버지의 묵언 효행은 호기심을 넘어 나르훵트에게 무진한 상상력과 창의력의 원천이 되었다. 아버지의 숨어 있는 세계는 어떤 모양이고 무슨 색깔이고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를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더니 언제부터인가 나르훵트는 할아버지의 기이한 언행과 아버지의 조용한 실천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버무리고 삭히어 새로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쥐뿔도 없는’ 할아버지의 진실을 조금 비틀어서라도 ‘둘도 없는 효자’인 아버지의 진심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작문의 천재로 인정받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르훵트는 아침부터 더 멋진 할아버지와 더 위대한 아버지를 찾기 위해 할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녔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손자가 옆에 있거나 말거나 변함없이 개차반이었지만 나르훵트도 시궁창 속에서 꽃을 피워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3대가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아버지 등에 업혀 있었고 나르훵트는 뒤따라가며 무언가를 쪽지에 적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나르훵트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질 즈음, 그는 <위대한 나르훵트 家의 잠언>을 출간했다. 그는 서문에서 ‘할아버지의 위대한 삶의 발자취를 새롭게 조명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할아버지 이야기보다 대부분 자신의 느낌과 생각이었다. 평론가들도 할아버지가 누구였는가에 대한 이야기보다 나르훵트의 뛰어난 글솜씨에 초점을 두고 그의 표현력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책 표지 뒷면에 실린 유명 인사들의 한 줄 평에도 할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우리는 모자란 지성을 채우고 부족한 덕성을 갖추게 된다.’
‘이 책은 줄기차게 감성을 펌프질 한다. 나의 메마른 정서를 흥건히 적셨고, 아내의 책은 장장이 눈물 자국 투성이다.’
‘어리바리한 사람들은 이 책을 들고 다니기만 해도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책 띠지에는 ‘작문의 완결판’, ‘금세기 최고의 명저’라는 홍보문구가 책 제목만큼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책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서점 앞에 줄을 섰다. 나르훵트의 스케줄에는 수많은 인터뷰와 강연 일정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2. 아버지의 배신
“나의 아버지는 개망나니며 생양아치였습니다.”
<위대한 나르훵트 家의 잠언>이 사람들에게 정신의 양식이 되고 참다운 삶의 기준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어느 날, 한 텔레비전 탐사보도 프로그램에서 <이상한 나르훵트 家의 증언>이 방영되었다. 나이가 90이 넘은 나르훵트의 아버지가 출연하여 자신의 가정사에 대한 증언을 쏟아낸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그냥 쓰레기였습니다. 여러분의 책꽂이에 꽂혀 있는 그 책은 나의 아들이 나의 아버지의 구역질 나는 언동을 비단으로 포장하고 향수를 뿌려 놓은 것입니다.”
한 시간 동안 계속된 증언은 그가 평생 했던 말보다 더 많은 말이었다. 흥분한 기자의 질문에 아무런 표정 없이 느릿느릿하지만 또박또박 대답한 그는 아버지의 욕설과 망언을 ‘주둥아리 난동’이라며, 아버지의 난동 짓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자식으로서 그냥 숨길 수도 있는데 이제 와서 이런 충격적인 증언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아무리 아버지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 할지라도 ‘개망나니’나 ‘생양아치’, 또는 ‘주둥아리 난동’ 같은 표현은 자식이 아버지에게 할 수 말은 아닌데, 그것 역시 막말이 아닌가요?”
인터뷰 내내 탁자만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자세를 약간 고쳐 앉으며 기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개망나니’, ‘생양아치’, 사람들은 내 아버지를 다 그렇게 불렀습니다. 우리 가문에도 사람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을 죽기 전에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예기치 않은 텔레비전 출연과 폭로에도 나트훵트는 별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의 난동을 수없이 보고 자랐기 때문에 집안에서 일어난 웬만한 충격은 얼렁뚱땅 넘겨 버리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 오히려 그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버지가 어떻게 탐사 기자에게 낚였는지가 더 궁금했다.
“끝으로, 지금 이 방송을 보고 있을 아들, 나르훵트씨에게 꼭 해 주실 말씀이 있습니까?”
“그놈은 그놈만의 방정식이 있습니다. 쓰레기를 보물로 둔갑시키는 방정식이지요. 진짜 보물이 아니라 보물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입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그놈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그 알량한 방정식에 내 말을 집어넣고 돌리는 일에 더 흥미를 가질 겁니다. 차라리 어항 속에 있는 금붕어에게 말하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르훵트 집 앞에는 사람들이 내다 버린 <위대한 나르훵트 家의 잠언>이 잔뜩 쌓여 있었다. 고물상들이 고물 수거차 몇 대로 부지런히 책을 실어 날랐지만 쌓여 가는 책 더미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버지를 위해 썼던 책이 아버지의 양심선언으로 쓰레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나르훵트는 나르훵트답게 판을 뒤집었다.
“할아버지의 난동은 사실이지만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의 펜 끝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쓰면 그것이 곧 역사다. 또한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건대, 무엇을 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쓰기의 기본이고 핵심이다. 세상은 상식대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몰상식을 글감으로 해야 세상을 움직이는 글이 나오고 돈도 벌 수 있다. 특히 양심이나 정의 같은 것에 얽매이거나 철학과 논리를 앞세우면 아름다운 글이 나오지 않는다.”
체면이 구겨진 나르훵트는 좀 더 강한 이미지와 때로는 파격을 보이면서 자신의 위상을 새롭게 세워 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또한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시대를 혁명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글 쓰고 돈 잘 버는 나르훵트, 천기누설하다>를 출간했다. 글을 써서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나 그가 기대한 만큼 많은 책이 팔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떤 신문사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필독도서가 되었다.
3. 아브락사스의 꿈
“이렇게 추운데 저 사람들은 뭐 하고 있어요, 엄마?”
“쓰레기를 줍고 있단다.”
“모두 정장을 하고 있는데 환경미화원 같지 않아요.”
“신문사에서 글 쓰고 돈 잘 버는 사람들이란다.”
“그런데 왜 글은 안 쓰고 아침부터 쓰레기를 주운데요?
“글도 쓰긴 하지. 저 쓰레기에는 자기들의 글이 실려 있단다.”
“글을 써서 쓰레기로 버릴 거면 뭣 하러 글을 쓰고 그런데요?”
“엄마가 지금 운전하고 있으니까 자꾸 헷갈리게 하지 마라.”
“쓰레기가 될 글을 쓰고도 저렇게 패셔너블한 차림을 할 수 있어요? 회사가 엄청 부자인가 봐요, 그래서 월급도 듬뿍듬뿍 주고. 나도 커서 그 회사에 들어가야지!”
“그러려면 양심이나 염치, 자존심 같은 것들은 다 지워버리고 욕망으로만 단단히 무장을 해야 할 텐데.”
“양심, 염치, 자존심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런 것들은 개나 줘 버리고 일단 돈부터 번 다음 나중에 필요하면 적당히 챙기면 돼요!”
“그러면 돈은 좀 벌지 몰라도 개보다 못한 인간이 될 수도 있는데......”